일제시기 불우한 삶을 살다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이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987)의 결혼식 방명록에 남긴 친필 축하 글이 발견됐다.
구보의 장남 박일영(70)씨는 구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 청계문화관에서 6월 15일~7월 5일 열리는 구보의 유물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상의 글을 발견했다고 20일 밝혔다.
박씨는 "문인을 비롯한 20여 명의 축하 메시지가 담긴 방명록에 단짝이던 이상의 글이 없다는 점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방명록 첫 장에 '以上(이상)'이라고 서명한 글을 발견하고 필적 감정을 통해 이상의 것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상이 방명록에 남긴 글은 '結婚(결혼)은 卽(즉) 慢畵(만화)에 틀님업고/ 慢畵의 實演(실연)에 틀님업다/ 慢畵實演의 眞摯味(진지미)는/ 또다시 慢畵로-輪廻(윤회)한다'는 것. 글 말미에는 1934년 10월 27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이상의 이름인 '상(箱)' 자가 적혀있다.
이상이 '만화'의 '만'자에 사용되는 '흩어지다'는 뜻의 '漫'자 대신 '게으르다' '느슨하다'는 의미의 '慢'자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만화'라는 단어의 허황된 것이라는 뜻에 '느슨하고 일상적인 그림'이라는 의미를 더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상, 박태원, 정인택 등은 당시 매우 잘 어울리던 친구였으며, 이런 말장난은 이상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매우 흥미로운 자료"라고 평가했다.
이 방명록에는 당시 다른 문인들의 재치있는 축하 글과 메시지도 적혀있다. 시인 정지용(1902~1950)은 '꽃 피였으니/ 열매 열고/ 뿌리는 다시/ 깊이-'라는 시적인 구절을 남겼다.
소설가 이태준(1904~?)은 '1+1=1'이라는 압축적인 수식과 함께 열매 그림을 그렸으며, 소설가 겸 시인 조벽암(1908~1985)은 '結婚生活(결혼생활)은 이밥(쌀밥) 갓소. 맛은 없어도 일생(一生)을 질기는 것이오니'라는 글을 남겼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