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제주 조천읍에서 70대 부부가 자택에서 수십 차례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3시간 뒤 수사팀은 인근 여관에 기거하던 윤모(43)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2시간여 대치 끝에 체포했다. 정신분열증을 앓던 윤씨는 피해망상에 빠져 어릴 적부터 부모처럼 돌봐준 노부부를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5시간여만의 깔끔한 해결이었다. 숨은 힘은 검시관과 범죄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의 공조였다. 검시(檢屍)와 현장 감식 등을 통해 범인이 면식범이면서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현장에 출동해 시신의 상태를 초동 감식하고 혈흔 정액 등 증거물을 수집하는 검시관.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 등으로 주목받은 프로파일러에 비해 일반인들에겐 생소하지만, 최일선에서 숨은 활약을 펼치며 과학수사의 한 축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 주검과 대화하는 석ㆍ박사 출신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시신은 손상 형태와 변질 정도 등 다양한 흔적을 통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 일러준다. 주검과 대화하며 그 무언의 언어를 잡아내는 것이 바로 검시관의 역할이다.
과거 일선 경찰이 맡던 현장 감식에서 검시를 전문화 해 2005년부터 선발했다. 물론 시신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에 달렸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검시관들의 빠른 현장 판단이 사건의 신속한 해결에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한다.
현재 전국에서 활약하는 검시관은 56명. 지난해까지 세 차례 선발했는데, 7급 검시관은 의료ㆍ보건 또는 생물학 생화학 등 관련분야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로 관련 연구ㆍ근무 경력 2년 이상, 9급은 임상병리사나 간호사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시신을 끼고 사는 일이라 꺼릴 것 같지만, 경쟁률이 의외로 높다. 지난해 임용된 3기의 경우 7급은 6명 모집에 37명이 지원해 6.2대1, 9급은 11명 선발에 303명이 몰려 27.5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끔찍하게 훼손된 주검과 마주하는 일이 꺼림칙하지 않을까. 제주 노부부 살해 사건의 검시를 맡았던 제주경찰청 임형수 검시관은 "비명에 간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의학과 연구교수 출신인 그를 검시관의 길로 이끈 것은 과학적 탐구심. 그는 "전공 지식을 현장에서 접목시켜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 과학수사 두 바퀴 검시관-프로파일러
살인사건에서 검시관과 프로파일러의 역할은 과학수사를 이끄는 두 개의 바퀴와 같다. 최근 여러 사건에서 양측의 공조가 빛을 발하면서 협력관계가 더욱 두터워지고 있다.
지난 7, 8일 충북 제천에서는 전국의 프로파일러 31명, 검시관 44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합동 워크숍이 열렸다. 최근 양측의 긴밀한 공조로 범인 검거의 결정적 단서를 포착한 주요 사건들의 구체적 경험을 공유하고, 공조의 강도를 높여 갈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첫 사례로 제주경찰청 임형수 검시관과 서종한 분석관이 제주 노부부 살해 사건을 발표했다. 우선 현장 감식에서 반항 흔적이 없고 비교적 현장이 깨끗한 점으로 미뤄 강도보다는 면식범에 의한 보복성 범죄로 추정됐다.
곧이은 검시에서 용의자 폭이 더욱 좁혀졌다. 임 검시관은 "피해자의 눈 부위와 코 등에 상처가 집중돼 정신분열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신분열증 범인의 경우 얼굴이나 인대 등 특정 부위를 집중 공격해 상대를 완전히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 서 분석관은 이를 바탕으로 용의자를 분석해 수사진에 알렸다.
노부부의 아들이 정신분열증 환자로 드러나 1차 용의자로 떠올랐으나, 분석팀은 "가족일 경우 범행 현장이 난잡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건은 깨끗해 아들로 특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결국 인근에 사는 윤씨가 범인으로 밝혀졌다.
■ 시신에 새겨진 범인의 자취
최근 검시관들의 활약이 돋보인 사건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 7월 경북 김천에서 발생한 소주방 여주인 피살 사건도 그 중 하나다. 당시 분석관은 난자당한 시신에 대한 검시 의견 등을 토대로 '음주 중 무시발언 때문에 벌어진 우발적 살인'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범인은 혼자 술을 마시러 와 여주인과 대화를 나누다 모욕적인 말에 격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경북경찰청 김대열 검시관은 "살해 후에도 분이 가시지 않은 듯 계속 폭력을 가했음을 보여주는 혈흔의 응고상태, 다양한 범행도구에 의한 마구잡이식 상흔 등으로 미뤄 모욕감에 따른 충동적 살인으로 추정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부산 해운대 반여동에서 발생한 20대 남성 화재 변사사건의 경우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 2명을 풀어줬다가 이들이 동반 자살해 비난을 받았으나, 검시를 통한 용의자 분석은 정확했다.
부산경찰청 김해선 분석관은 "9㎝ 깊이의 치명적 상처와 사망과 관련 없이 국부에 집중된 공격 등 상흔이 크게 2가지로 나눠졌는데, 상처 깊이가 힘의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다르다는 검시 결과에 따라 범인이 남녀 두 사람 이상으로 추정됐다"며 "특히 상흔의 위치로 봐서 성 관련 원한 살인으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실제 범인은 피살자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19세 여성과 그를 맹목적으로 따른 30대 남성이었다.
김성환 기자 bluebir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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