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 반란을 일으킨 북파 공작 부대원(설경구)이 지휘관(안성기)을 향해 AK47 소총을 겨눈다. "날 죽이고 가라"던 안성기는 설경구가 머뭇거리자 권총을 머리에 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사용된 총기는 모조 소품이 아닌 진짜 총이었다. 이 영화의 특수효과를 담당한 국내 특수효과계 대표주자인 D사 대표 정모(51)씨가 지난 13년간 M16 등 실제 군용 총기를 불법 소지하며 영화 제작에 사용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국가정보원과 공조해 정씨와 총기 부품, 권총 등을 불법 유통시킨 일당 등 9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총기 22정과 군용품 1,000여 점을 압수했다고 21일 밝혔다.
정씨는 1996년 6월 미국 영화사 파라마운트 관계자로부터 M16, AK47, 베레타 권총 등 총기 18정을 넘겨받아 영화 제작에 활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검사 결과 정씨가 보유한 총기가 실탄만 있으면 언제든 실제 사격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
88년 D사를 설립한 정씨는 실감 나는 폭파 장면과 총격전 등으로 평판이 높아 '실미도' 외에도 '공공의 적' '태극기 휘날리며' '유령' 등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특수효과를 맡았다.
현재 군용 총기류는 민간인이 보유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군 당국이 대여를 불허하기 때문에 영화 제작에 사용할 방법이 없다. 정씨는 경찰 조사에서 "사실 진짜 총이어서 그동안 불안 불안했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영화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사무실에서 총기를 허술하게 관리해 다른 곳으로 새나갈 위험도 컸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와 함께 자신의 비밀창고에 군용품 1,000여 점을 진열해 놓고 군사용품 마니아들에게 판매한 혐의로 문모(30)씨 등 3명도 입건했다.
이들이 97년부터 운영한 동대문구 신설동의 비밀창고에선 M16 개머리판과 실탄, M60 기관총 총열 등 부품과 연막수류탄, 지뢰탐지기에 바주카포까지 발견돼 군용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이들 군용품 대부분이 미군들이 쓰는 것이어서 경찰은 미 육군 범죄수사대와 함께 유출경로 등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또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권총을 밀반입해 인터넷 카페를 통해 사고 판 권모(31)씨 등 4명도 붙잡았다. 권씨는 지난해 5월 중국에서 독일제 공기총인 '스피스윌슨 38'을 들여와 장모(22)씨에게 40만원에 판매한 혐의, 이모(39)씨는 2005년 6월 일본에서 '스미스윌슨 M36' 권총 3정을 반입해 다른 장모(38)씨에게 200만원에 팔아 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총기 마니아 모임인 인터넷 카페 '건XX', '총XX'의 회원들로 일부 회원은 구입한 권총에 납탄을 넣어 실제 사격을 실험해 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총기류가 마니아 사이에서만 거래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조폭 등 범죄 집단에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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