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과 거취 논란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사법부가 자칫 이념 논쟁에 휘말릴 위험에 처했다. 단초는 엊그제 언론이 보도한 박시환 대법관의 발언이다. 그는 이번 사태를 '5차 사법파동'으로 규정하면서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 속에서 원인을 규명해 이번 기회에 끊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법관은 어제 "특정 주장에 동조한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기다렸다는 듯 즉각 이념 공세에 나섰다. 소장 판사들의 신 대법관 사퇴 요구를 사법부내 진보세력의 공세로 규정하면서 오히려 박 대법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나아가 소장 판사들의 집단 행동에 미온적이었다며 이용훈 대법원장의 책임론까지 거론했다. 진보ㆍ개혁 성향 대법관들을 정면 겨냥한 것이다.
여기에 정치권도 가세했다. 대법관 출신인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박 대법관 사퇴를 요구한 반면 민주당은 신 대법관 탄핵 발의를 추진키로 했다. 사법부가 내환에 외우까지 겹친 형국이다. 그러나 사법부 바깥에서 공연히 이념을 무기로 사법부를 흔들고 구성원들을 편 가르는 것은 아주 무모하고 위험하다. 진정으로 사법부가 바로 서기를 원한다면 이기적 목적과 천박한 논리로 사법부에 간섭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사법부는 사회의 여러 가치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 의율해야 하는 독립된 기관이다. 사법부가 이념 대결의 장이 되고, 이념과 정치의 영향에 흔들린다면 그 혼란의 고통과 폐해는 모두 국민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사법부를 보수든 진보든 편향된 이념의 색깔로 덧칠하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사법부가 겪는 갈등은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정직한 몸부림이라고 본다. 소장 판사들이 절제된 표현으로 신 대법관의 사퇴를 호소하는 바탕에는 헌법이 규정한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제대로 보장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법관에게 생명과도 같은 재판상 독립을 침해한 상징적 존재로서 그의 용퇴를 건의하고 있다. 이처럼 '법에 의한 정의'의 본질을 천착하는 진지한 노력은 이념이나 정치와 무관하고, 그런 것들이 끼어 들 틈도 없다.
사법부의 진통을 사회 모두가 조용히 지켜볼 때다. 법관들의 분별력과 사법부의 자결(自決) 능력을 믿고 스스로 난국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진 뒤의 햇살이 더 명징하게 빛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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