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마음은 오랫동안 정 줄 곳 찾지 못해 둥둥 떠다녔다. 정당 지지율에서 부동층 비율이 수위를 달린 지 오래다.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사회의 담론 생산집단 중 어느 누구도 그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특정 인구층으로부터 인기를 누렸던 집단이 가끔 있긴 했지만 대다수의 마음을 성공적으로 사로잡았던 집단은 없었다. 정치집단뿐만 아니다. 사회운동집단, 기업집단, 학술집단, 문화집단 어떤 이름을 대더라도 그렇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정치인의 말을 가끔씩 접한다. 언뜻 멋진 말처럼 들리나 따져보면 터무니없는 말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은 선의의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말과 유사하다. 인기란 다양한 대중의 마음을 끄는 일인데 인기에 관심두지 않는다 함은 일부 대중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인기란 그에 연연하자고 해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중의 마음을 사서 인기를 누리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라 생각한다면 정치를 처음부터 다시 배울 일이다. 수많은 드라마가 있지만 인기 드라마는 몇 편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가요는 어떤가? 온갖 기획을 다해 제작을 해도 인기를 끌기란 로또 담청에 비유될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런 판에 인기를 아무나 얻는 것인 양 내팽개치는 모습에 '정치를 포기했군'이라고 말할 수밖에 더 있을까.
존재의 이유인 인기를 내팽개치는 모습을 정치권만 독점으로 연출하진 않는다. 지상파 방송도 만만찮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마다하겠다며 '인기 추락시키기 작전 카르텔'에 접어든 듯 희한한 경쟁을 벌인다.
그나마 인기 있던 프로그램이나 출연진을 낙마시키는 장면을 대하면 심증은 굳어진다. 시계바늘을 한참 뒤로 돌린 듯한 계도 프로그램, 바른생활 프로그램 등 흑백 TV식 미장센을 대할 때면 심증은 확증으로 바뀐다.
지상파 방송은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20여년 동안 느릿느릿한 인기상승을 누려왔다. 마음 줄 곳 없는 대중들이 우스개에 화려한 무대에 취하기도 하고, 궂은 세상일을 잊기 위해 그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런 까닭에 방송의 사회적 비중이 전에 비해 많이 커졌다. 방송 제작진들도 그에 고무되어 웃음, 화려함과 동시에 가려운 곳도 긁겠다는 다짐을 해왔다. 기댈 곳 없어하던 대중에 조금씩 다가가는 느린 행보를 보여온 셈이다.
모처럼 꾸려낸 그 느린 행보마저 그만두려는 심사를 알기 위해 방송 내부를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증언들이 줄을 댄다. 외부 출연진에 대한 당부의 말이 과거에 비해 많아졌다 한다.
시청자 평가원의 원고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제작자의 고집도 있을 정도로 내부 검열에 분주하단다. 정부가 의뢰한 프로그램도 별 저항 없이 만들어 방송하고 있으니 그 정도 간섭은 얌전한 것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인기 프로그램을 만들던 제작진의 한숨도 높아졌다고 한다. 상상력을 스스로 제한하거나 제작에서 손을 떼려는 제작진도 만난다. 해외연수를 앞두고 있거나 준비 중인 방송인도 자주 대한다.
말의 위축, 상상의 빈곤, 의지의 퇴화 이 모든 것이 지상파 방송 내부에 한 번에 몰아닥친 듯하다. 그래서 내부는 뒤숭숭하고, 그 분위기는 우중충한 화면으로 전해진다.
그런 탓에 마음 줄 곳 없는 대중들의 또 다른 한 편이 무너지고 있다. 지상파 방송의 위기가 산업 위기이거나 제도 위기가 아닌 존재 위기로 규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기를 포기해도 대중은 집토끼마냥 오도 가도 못 한 채 지상파 방송에 묶여 있을 거라는 착각의 장면이기도 하다. 20여년 동안 마음 줄 곳을 찾아다닌 산토끼 대중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연출이기도 하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