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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냉면 최고의 맛은 어디, 순례의 계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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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냉면 최고의 맛은 어디, 순례의 계절이 왔다

입력
2009.05.28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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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1세의 김태원씨. 그의 일과는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해 커다란 솥단지에 육수를 끓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가 하루에 끓이는 육수의 양은 무려 500리터. 올해로 58년째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는 일이다.

벽제외식산업개발의 조리부 실장인 김씨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벽제갈비와 평양냉면 전문점 봉피양의 냉면 요리를 책임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직함 대신 장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그의 인생은 냉면과 함께 흘러왔고, 냉면 속에 그의 인생이 있다.

김씨의 냉면 인생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시작됐다. 충북 청원군 옥산면 출신인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징집을 피해 무작정 서울로 도망쳐왔고, 우연히 소개로 취직한 곳이 주교동의 '우래옥'이었다.

평양 출신 주방장의 발치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툭툭 차는 발길에 새벽 4시면 일어나 장작을 피우고 무쇠솥에 육수를 끓였다. 수세미가 없어서 풀뿌리를 말려 냉면 그릇의 기름때를 닦았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늘 남아서 불어터진 냉면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잠을 푹 잔 적이 없다. 육수를 만들 때는 수시로 불순물을 걷어내야 누린내가 나지 않기 때문에 한시도 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육수 맛이 달라지면 주인장이 육수가 든 드럼통을 엎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남에게 대신 시킬 수도 없었다.

이렇게 정성을 쏟은 만큼 우래옥의 냉면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김씨는 "우래옥 냉면이 너무 잘 팔리니까 경쟁 식당이던 서래관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싸움이 붙기도 했다"며 웃었다.

김씨는 제대 후인 60년대 중반부터 우래옥의 주방을 책임지게 된다. 특히 1978년 우래옥의 종로 분점으로 옮겼을 때는 하루 20그릇 팔리던 냉면이 400그릇 넘게 팔리면서 본점 보다 손님이 많이 몰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론은 본점 복귀. 그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경무대에서 사람들이 나와 내가 만든 냉면을 여러 차례 사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80년대 초반에는 유명 요정이었던 대원각 주방장으로 스카우트되어 10여년 일했다.

을지면옥, 평안면옥 등 평양냉면집이 문을 열 때 그가 뒤에서 코치를 해주는 일도 잦았다. 92년 지금의 직장에 자리잡은 뒤부터는 후계자를 키우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일이 힘들다보니 오래 버티는 젊은이가 많지 않고, 조금만 가르치면 개업을 하겠다고 나간다. 인내심이 부족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사장이 된 적이 없다. 늘 주방의 뜨거운 불 앞이 그의 자리였다. 이유를 묻자 그는 "집사람이 장사는 하지 말라고 말렸다"며 웃었다. "사업을 하려면 얼마나 신경쓸 일이 많아요. 내가 할 줄 아는 게 그저 평양냉면 만드는 것 뿐이니 그게 천직이라 생각했어요."

그의 평양냉면은 맑고 담백하다. 달짝지근한 맛에 길들여진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밍밍하다고 하기도 한다. 입맛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음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는 "손님의 입맛에 맞추다가는 본래의 맛을 다 잃어버리고 말 거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내가 배운 맛 그대로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육수를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보니 쇠고기, 돼지고기, 노계(老鷄), 감초, 생강, 파, 양파 등 뜻밖에 쉽게 재료 이름들이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배합 비율 만큼은 절대 비밀이란다.

대신 "육수를 끓이다 물이 졸면 중간에 육수를 퍼내고 물을 다시 넣어서 끓이는데, 처음 우린 육수와 두 번째 육수를 섞어서 최종 육수를 만든다"는 비법을 살짝 공개했다. 면은 메밀에 감자 전분을 섞어 반죽하지만, 나이 많은 손님들을 위해 순 메밀로 만든 순면을 별도로 준비한다.

김씨는 이날 주방에서 직접 메밀가루 반죽을 했다. 제자가 김이 올라오는 더운 물을 담아오자, 고개를 젓더니 찬 물을 떠오라고 시켰다. "날씨가 더우면 면이 잘 풀어지기 때문에 찬 물로 반죽하는 거예요. 여름에는 메밀 함량을 낮추고 삶는 시간도 줄여요. 반면 겨울에는 삶는 시간을 늘리고, 메밀 함량도 높이지. 겨울철 메밀은 갓 수확해 맛이 좋거든."

김씨는 어느새 면을 뽑고, 삶고, 찬 물에 씻어 건져낸 뒤 곱게 고명을 얹고 육수를 넉넉히 부은 그릇을 내놓는다. 먹음직한 평양냉면을 보고 젓가락부터 드는 성급한 손님을 향해 김씨가 입을 뗐다. "육수부터 먼저 마셔봐요." 미소 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냉면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 진주냉면 드셔봤나요?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을 좋아하는 이 것은 무엇인가'

시인 백석(1912~1995)의 시 '국수'에 나오는 '이 것'은 한겨울밤 차가운 동치미국에 말아먹는 메밀국수, 즉 냉면을 가리킨다. 댕추가루(고추가루)와 탄수(식초)를 살짝 뿌리고 꿩고기를 꾸미로 얹어 뜨거운 아르??(아랫목)에서 먹던 이것, 냉면은 본래 겨울 음식이다.

요즘은 무더운 여름철 별미로 더 인기가 있지만, 지금도 냉면 맛을 제대로 안다는 이들은 여름보다 겨울에 더 냉면을 찾는다.

맵고 짠 음식을 싫어한 고종 황제가 즐긴 것도 동치미 냉면이다.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윤숙자 소장은 "고종의 동치미냉면은 수저로 긁어낸 배를 많이 넣어 달고 시원한 맛을 내고 열십자 모양으로 편육을 얹고 배와 잣을 덮은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냉면은 메밀국수를 육수에 말아먹는 평양냉면과 고구마나 감자 전분으로 만든 국수를 매운 양념에 비벼먹는 함흥냉면으로 크게 나뉜다. 평양냉면의 메밀국수는 찰기가 없어 툭툭 끊어지는 반면, 함흥냉면의 전분 국수는 질기고 쫄깃하다.

'냉면=이북 음식'으로 통하지만 남쪽에도 그에 필적할 냉면이 있으니 진주냉면이다. "진주를 떠나면 영영 이 맛있는 냉면을 못 먹게 될 텐데!" 이병주의 장편소설 '지리산'에서 일본인 교사 구사마가 한숨지으며 하는 말이다.

북한에서 펴낸 <조선의 민족전통 ⅰ-식생활풍습> (1994)은 '냉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진주냉면은 권력 있는 사람들이 기생집에서 야식으로 즐겨 먹던 음식으로, 메밀국수에 고기 대신 해물 육수를 쓰는 게 특징이다. 진주냉면이 전국에 널리 알려진 것은 10년 정도 밖에 안 됐다. 가장 유명한 집으로 진주 서부시장의 '진주냉면'이 있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이 집은 새우, 멸치, 홍합, 바지락, 황태 등 해물로 육수를 만드는데, 달군 무쇠를 육수에 넣어 비린내를 없애고 보름 간 항아리에서 숙성시켰다가 쓴다. '진주냉면' 정운서 사장은 "주말에는 제주도 등 외지에서 온 손님이 전체의 60%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평양냉면은 구수한 메밀 맛과 담백한 육수로 유명하지만, 처음 먹는 사람들은 밍밍하고 푸석푸석하다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을밀대'(서울 마포구 염리동) 주인 김영길(46)씨는 그런 손님을 많이 봤다.

"처음엔 이게 뭐 맛있냐고 하던 손님이 며칠 뒤 다시 와요. 먹고 돌아가는 길에 그 맛이 자꾸 입안에서 맴돌아서 다시 왔다는 거에요. 그렇게 한 세 번 먹어 본 뒤에야 '아, 이게 바로 냉면 맛이구나. 은근히 중독성이 있네' 그러죠."

냉면 맛에 관한 한 경지에 오른 고수급들은 식초나 겨자를 치지 않고 국물부터 마시고 본다. 그래야 국물의 제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냉면처럼 찬 음식은 겨울에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운 여름에는 인체가 체온을 조절하느라 내장 쪽 온도가 내려가는데 찬 냉면을 먹으면 속이 더 차가워져 안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이 냉한 사람이 여름에 냉면을 자주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냉면에 곁들여 먹는 무채다. 맹화섭한의원 맹원모 원장은 "냉면 재료인 메밀은 성질이 차고 속을 훑어 내리는 음식인데 무채는 메밀의 찬 성질을 상쇄시킨다"고 설명한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차예지기자 nextwave@hk.co.kr

■ 집에서 만드는 냉면 레시피

냉면은 좀처럼 제 맛을 내기 힘든 요리다. 유명한 냉면 전문점들은 직접 국수를 뽑고 장시간 육수를 고아 맛을 내지만, 집에서 따라하기는 쉽지 않다. 리빙아트스쿨 '까사스쿨'의 푸드아티스트 이종국씨는 집에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동치미 국물을 활용한 동치미 배 냉면을 추천한다.

이씨는 "냉면을 만들 때는 면이 불지 않도록 조리 시간을 짧게 하는 게 포인트"라면서 "면을 삶은 후 여러 번 씻지 않으면 면끼리 뭉치고 쫄깃하지 않게 된다"고 귀띔했다.

● 재료

동치미 국물 3컵, 식초 소금 꿀 참기름 약간, 배 1/2개, 오이, 동치미 배, 잣가루, 시중 판매 면

1. 냉면 사리를 삶아서 찬 물에 6번 정도 씻어낸 후 얼음물에 2분간 주물러 탄력을 준다.

2. 물기를 뺀 냉면사리에 참기름을 약간 넣어 양념한다.

3. 동치미 국물에 식초, 소금, 꿀을 넣어 양념한다.

4. 동치미 배는 칼로 써는 대신 수저로 큼직하게 파낸다.

5. 오이는 소금물에 씻고 얇게 썰어 소금에 절인다. 물기를 짠 뒤 참기름을 두른 팬에 살짝 볶고, 접시에 펼쳐 냉동실에 7분 정도 보관한다.

6. 사리를 그릇에 담아 큼직하게 파낸 배를 올리고 양념된 동치미 국물을 넣는다. 오이볶음을 올리고 잣가루를 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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