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7일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서해 북방한계선(NLL) 주변 수역에서의 군사적 타격을 언급한 것은 제3의 '연평해전' 을 도발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이와 관련,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의 연평해전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1차 연평해전은 6ㆍ25 전쟁 이후 남북한 정규군이 최초로 맞붙은 전투다. 양측의 탐색전이 길었고, 그래서 우리도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북한이 꽃게잡이 어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경비정을 투입, 6월7일부터 교전이 발발한 15일까지 9일간 11회에 걸쳐 연평도 인근 NLL을 침범하자 남한도 고속정으로 맞대응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15일 오전 9시28분, 선체로 밀고 밀치며 몸싸움을 벌이던 중 남한 고속정이 밀고 들어오는 북 경비정을 피해 되치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북측이 먼저 사격을 가했고 남한 고속정도 대응사격을 했다. 교전시간은 불과 14분. 북한은 30명이 넘는 사망자와 함정 2정 침몰, 3정 대파라는 치욕을 안고 퇴각했다. 반면 남한은 사망자 없이 경미한 물적피해에 그쳤다. 정보수집과 전술, 전력배치가 조화를 이룬 덕분이었다.
당시 북한은 금창리 핵 시설 의혹, 대포동 미사일 문제 등을 놓고 미국과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연평해전에도 불구, 남북간에는 차관급 회담 개최가 합의되고 이듬해 6월에는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평화무드가 이어졌다.
이 와중에도 북은 NLL 문제에 있어서는 강경책을 고수했다. 북한은 1차 연평해전 후 열린 장성급회담에서 새로운 해상분계선을 제시했고 같은 해 9월에는 북한군 총참모부 특별보도를 통해 NLL 무효화를 선언하고 '인민군 해상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2000년 3월에는 '서해 5개섬 통항질서'를 발표했다.
북한이 일으킨 2차 연평해전을 앞두고는 별다른 예고가 없었다. 월드컵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2년 6월29일, 북한 경비정 2정이 NLL을 넘어오자 우리 해군 고속정 2정도 현장에 출동해 경고방송을 했다. 통상적인 대처방식이었다. 그러다 북한 경비정 중 1척이 급작스레 선제사격을 가했고, 양측이 25분간 사격전을 하는 과정에서 남한은 장병 6명이 전사하고 고속정이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다.
1차 연평해전 이후 북한 경비정이 매년 5, 6월 꽃게잡이 철이면 수시로 NLL을 넘나들었다가 되돌아가는 술래잡기가 반복되자 긴장감을 늦췄다가 허를 찔린 것이다. 특히 해군은 당시 공격에 가담했던 북한 경비정의 정확한 재원과 화력을 파악하지 못해 정보력에서도 구멍이 뚫린 상황이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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