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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효의 유씨씨] 그는 우리에게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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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효의 유씨씨] 그는 우리에게 누구였을까

입력
2009.05.28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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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정각에 지하철 강남역 6번 출구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1982년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만났으니 두 세기에 걸쳐 28년 째 만나는 친구들이다. 그 사이 한 친구는 대학교 교수가 됐고, 다른 한 친구는 전업 소설가가 됐고, 또 한 친구는 꽤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강남역에서 만나 분향을 하자는 전화를 한 사람은 소설가 친구였다. 넷이 함께 모이려면 대개 몇 번의 시간 조정을 거쳐 겨우 시간과 장소를 잡던 여느 때와 달리 이날은 다들 아무 군소리 없이 소설가의 말을 따랐다. 한 둘은 늘 늦던 다른 때와 달리 다들 제 시간에 나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다 평상복이었지만 집에서 나온 소설가는 회색 재킷에 검은 셔츠의 상복 차림이었다.

벼랑에 홀로 서게 둔 회한

6번 출구 옆 분향소에서 시작된 사람들의 줄이 한 블록을 지나 뒷골목까지 돌아가 있었다. 우리는 줄 맨 끝에 가서 섰다. 자세히 보니 상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은 사람도 꽤 있었다. 노점상들은 분향소를 위해 자진해서 장사를 중단했단다. 뒷줄에서 계속 시끄럽게 떠들던 대학생들이 그 옆에 있던 20대 여성의 "분향하러 온 거 맞아요?" 라는 말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대열 속에서도 계속 눈물짓던 이 여성의 손에는 누군가 뽑아 피기 좋게 한 가치가 반쯤 솟아 올라온 담뱃갑이 들려 있었다.

방명록에 쓴 조문에는 '죄송해요'라는 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소설가 친구도 죄송하다고 썼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기다린 것보다 분향 과정은 훨씬 간단했다. 나오면서 보니 사업가 친구가 울고 있었다. 소설가 친구가 말했다. "어디 가서 소주 반 병씩 만 먹고 가자" 슬픔에 침잠하기에, 그러나 그 슬픔에 압도당해 미친척하지 않기에 소주 반 병은 절묘한 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를 마시면서도 분위기는 무거웠다. 자식들이 고등학교에 갈 나이들에 혈육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의 죽음에 이렇듯 무거워 질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아직도 어떤 대의나 정치적 상상력에, 혹은 또 그 어떤 숭고한 것에 슬퍼할 수 있는 혈기가 우리에게 남아 있었단 말인가.

왜 죄송하다고 방명록에 썼냐는 내 질문에 소설가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더 지지하지 못해서, 한때 잠깐 지지한 걸 후회해서, 그리고 결국 집 뒤 벼랑에 혼자 설 수 밖에 없도록 외롭게 해서". 그가 오열하며 말했다. 그와 함께 5공 청문회를 보면서 열광하던 1988년 늦가을이 생각났다. 둘 다 제대하고 복학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던 무렵이었다.

고인은 그때 전직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졌다. 한 기업인에게는 "노동자들에게는 그렇게 야박하면서 어떻게 부당한 정권에는 그렇게 많은 돈을 줬냐"고 울먹이며 따지기도 했었다.

그는 머리가 아닌 우리의 가슴으로 들어온 최초의 현실 정치인이었다. 한 세대에게는 그 세대의 정치인이 있다. 노무현은 우리 세대의 정치인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꿈꿨던 것들이 그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가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현실적 권력자가 되는 것도 보았고, 그러나 그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자리인지도 보았다. 그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의 순수한 꿈을 상징

그는 우리에게 도대체 누구였을까. 미학을 전공한 교수 친구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는 현실에서 실체화된 우리들의 꿈이었다. 아니면 이 나이까지도 남아 있는 청춘, 그 순수성의 등가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청춘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 앞에는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결혼시키고 늙어가야 할, 길고 지루한 기성의 시간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가는 이제 술집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고, 계획과는 달리 소주는 벌써 다섯 병째 비워지고 있었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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