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깨 위에 다섯 살 꼬마가 타고 있다. 꼬마 손에는 촛불이 들려있다. 경찰이 막아선다. 목말 탄 꼬마는 의아해 한다. 엄마 아빠는 촛불을 갖고 다니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진다. 경찰관은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한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아슬아슬하다. 그 때 꼬마가 촛불을 끈다. 경찰관들은 이제 가도 좋다고 한다.
대한문 분향소 앞의 한 삽화다. 이 얼마나 초라한가. 이 보도를 보면서 저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능멸하고 이명박 정부에 멍에를 씌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살 꼬마의 촛불을 막는 경찰관, 덕수궁 주변을 둘러막은 경찰차의 장벽은 지금 한국의 초라한 상황을 만방에 알리는 자해에 다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봉하마을로 조문하러 간 정치인들을 막고 물세례를 가하는 것 역시 분별없는 행위다. 물론 막는 이들의 가슴에 왜 분노가 없겠는가. 전직 대통령을 파렴치범으로 몰아가고, 지난 권력은 밑창까지 훑으면서 살아있는 권력에는 이메일 조사나 하는 편파성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싶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자살을 택해야 했던 그 번민과 고통을 조문 방해라는 옹졸함으로 표현하는 것은 고인을 욕되게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더 참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정파적으로 재단하고 이용하려는 것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25일 월요일. 많은 전화를 받았고 많은 의견이 전달됐다. 눈물 섞인 소회부터 아쉬움, 격정적 분노까지 다양했다. 다 받아들일 만 했다. 그러나 두 종류의 전화는 신경세포를 건드렸다.
하나는 한국일보가 서거 지면을 너무 많이 다루었다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전화는 매우 완곡해서 이해할 만 했지만 다른 선배가 받은 전화는 압력으로 느낄 만 했다. 다행히 청와대나 검찰에서 그런 의견개진이 없었지만, 그 주변 인사들의 이런 전화는 마치 여권이 이 엄청난 비극 앞에서도 자기성찰 대신 미세한 정치적 계산에 매몰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더 큰 분열이 우려된다'는 6면과 관련, 노 전 대통령측 일부 인사들이 "사진 4장 모두가 봉하마을 조문을 막는 내용"이라는 항의를 전해온 것이다. 15개 면 중 단 1개면에 분열에 대한 우려를 전했는데도 '편파성'을 시비하고 나선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류의 항의에 대해 나는 전날(24일) 편집국 지면회의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날 많은 토론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 과연 옳으냐에 대한 진지한 논쟁도 있었다. 그 결과 헌정사상 초유의 비극, 그리고 죽음 자체의 엄숙함을 고려, 일단 충실히 사실을 전달하고 애도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리고 일각의 이념적 대립이나 조문방해 행위가 우리사회를 분열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전달하기로 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 고통스런 토론을 통해 마련된 월요일자 지면이었다.
자화자찬을 하기 위해 이를 소개한 것이 아니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택한 이 비극적 상황에서도 유불리를 계산하고 이용하려는 그 작음에 한마디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순간, 다섯 살 꼬마의 촛불을 막고 지면의 양이나 사진을 따질 게 아니라 노무현 시대보다 더 낫고,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게 당신들이,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이라고.
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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