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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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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무인도

입력
2009.05.2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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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그 외로움의 성분에 곰팡이가 끼고 누룩 뜰 때쯤

어느 멀리서는 이기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횃불을 피우고

더 먼 곳에서는 유해들이 배를 깔고 탄식하는 소리로

적막하기 그지없는 밤을 채우기도 하니까

바깥에서, 높은 곳에서, 운명이 비웃으며

우리들에게 약속의 증서를 써주었던 손으로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창문으로부터는 봄에 머물렀던

나뭇가지들이 기어올라온다. 어리석게도

껍질이 벗겨지는 곳에서 강이 태어나고

기념비적인 죽음도 생겨나리라. 서서히 묘역에서는

사랑했지만 이별한 사람이 먹다 남은 빵이 노래에 싸여

굳어지는 것을 본다

● 이별을 하고 난 뒤 며칠 몸살이 나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일터로 가서 일을 하고 그리고 몇 달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몇 달 혹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이 시를 읽어보시라고 이별을 한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다.

‘사랑했지만 이별한 사람이 먹다 남은 빵’, 그 빵을 포장할 수 있는 포장용기는 무엇인가? 당연히 노래다. ‘껍질이 벗겨지는 곳에서 강이 태어나’게 하는, 마지막으로 남은 그 무엇들조차 다 포장할 수 있는 것은 노래뿐. 그 포장지에 싸인 내용물이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노래는 노래한다, 짧막한 후렴구와, 말이 될 수 없어서, 우우, 아니면 랄라, 라고 마음만을 실어나르는 순간의 축복. 그 축복 속에 이별을 한 이들은 한없는 무인도에에서 굳어가는 빵을 바라보는 시간. 그러나 즐겁지 않은가, 우리 모두 잃어버릴 것이 있어서 마음 속에 무인도,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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