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이 뜰 때 - 강정
비가 그친 창문을 가만히 보면 빗물이 닦아 낸 것 말고 더 많은 얼굴이 서려 있다
한때 내가 낳은 적 있는 벌레 같은 이녁들이다
젊을 적 아버지가 미리 온 노년을 데워 밥을 지어 먹거나 밤새 몸 안에서 들끓던 눈물이 흙먼지로 묻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지구는 늑골을 앓으며 가장 가까운 별에게 거짓 편지를 쓰기도 한다
밤새 늙은 여자가 아이의 목소리로 울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켜 커튼을 연다 수두 자국처럼 짓물러진 이른 아침의 태양은 이미 폐경을 지나 우주의 먼 끝에서 석탄으로 뿌려진다
한나절의 밤이 떡시루처럼 늘어져 지구의 대낮을 쿵쿵 짓밟고 지나간 자리,
머나먼 적도의 어느 섬에서 백만 년을 산 파충류 어미가 인간을 닮은 파충류 새끼를 낳고 있다는 소식이다
목덜미가 아름다운 흑인이 뚜벅뚜벅 태양의 빈자리로 걸어 올라가고 있다
● 낮과 밤이 바뀌는 것, 아무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또 그 안엔 중요한 만남이 있다. 밤이 오면 태양이 일하던 곳에 한 잘 생긴 흑인이 올라와서 지구를 향해 멋지게 웃어준다는 건 근사하지 않은가? 검은 피부에 장신구들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별들이 기분좋게 부딪히는 금속 소리를 내며 흑인의 목걸이도 팔찌도 되어준다. 그렇게 지구는 이 멋진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긴 시간을 보낸다. 창틀에 걸린 샛별이 하얗게 될 때까지….
서동욱(시인ㆍ서강대 철학과 교수)
■ 강정 1971년 생.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 키스> 들려주려니> 처형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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