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남진(본명 김남진)과 나는 1965년에 만났다. 남진이 고등학교(경복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였다. 우리 나이 스무 살이 된 그는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울려고 내가 왔나> 라는 노래로 데뷔를 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울려고>
"가수로 성공할 수 있을 런지 노래 좀 들어보고 평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남진을 만났다. 물론 나는 그 무렵 연예기자로 한창 바쁘기도 했지만 방송 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서울 충무로에 있는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만난 그의 첫 인상은 매우 밝은 성격이라는 것이다. 인사를 잘 하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목소리가 떨리고 어색해 했다. 노래를 반쯤 부르다가 잠시 멈칫 하더니만, "다시 하겠습니다" 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마도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잠시 쉬었다가 그는 노래 <울려고 내가 왔나> 를 제법 잘 불렀다. 노래 한 곡을 들어 보고 그 사람의 장래를 평가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다른 가수의 노래 가운데 아무거나 자신 있는 것으로 두 곡만 더 불러 보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자신 있다는 듯이 최희준의 노래 두 곡을 연속으로 불렀다. 울려고>
그는 "고등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한 최희준 선생님을 닮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최희준의 창법을 흉내 내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를 듣고 난 후 이제는 내가 평을 할 차례가 되었다. 우선 나는 그에게 머리를 긁적거리는 버릇을 고치라고 했다. 오래된 습관인 듯 한데 무대 위에 서는 스타가 되려면 그런 버릇은 버려야 한다고 충고 했다.
그 다음으로는 최희준 노래의 모창 부분이다. 기성가수를 흉내 내는 것은 그 가수 보다 더 잘 부르더라도 대성 할 수가 없으니 모창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가수가 될 소질이 충분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끼'라는 것도 다분히 가지고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 때 그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제 막 신인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는 남진은 부모가 그의 가수 데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포의 부잣집 아들인 그는 매일 붉은 색 점퍼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다른 옷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응암동에서 친구하고 지내기 때문에 그렇다면서 또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그에게 집에서 어른들의 허락도 못 받은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가수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집요했다. 매일 내가 있는 신문사(한국일보)로 나를 만나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충무로의 한 다방으로 어머니를 모셔왔다.
매우 인자한 모습의 어머니는 "이 아이가 그토록 하고 싶어 해서 허락하기로 했으니 잘 부탁합니다"라며 내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가수 '남진'의 이름이 신문에 실리고 방송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진은 그때까지 전속 레코드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메이저 레코드회사가 3개가 있었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를 만들어서 대박을 터뜨린 '지구(전신은 미도파레코드사)'와 '오아시스', 그리고 '신세기' 등이다. 신인 가수를 전속 시키려면 그의 장래성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계약체결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통례다. 동백아가씨>
나는 세 회사 사장들과 직 간접으로 타진을 한 후 '지구레코드사'에 전속 시키기로 결정했다. '지구'의 임정수 사장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가 공전의 히트를 하는 바람에 가요계의 큰 손이 되었는데 남진이 뒤를 이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동백아가씨>
임 사장은 남진의 '지구' 전속기념으로 첫 곡을 박춘석에게 의뢰 했다. 작사는 정두수가 맡았다. 며칠 후 임정수 사장은 나에게 박춘석 작곡가의 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임 사장과 박춘석, 정두수와 나, 그리고 남진 등 다섯 명은 피아노가 있는 박춘석의 작곡 실에서 만났다.
남진이 취입하게 될 첫 노래를 들어보는 모임인 것이다. 노래 제목은 <낙도가는 연락선> 이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아주 구수하며 서정적이었다. 또 따라 부르기가 쉬워서 매우 대중성이 있어 보였다. 낙도가는>
나와 남진은 그 자리에서 이 노래를 수 십 번 불렀다. 모두들 흡족해 했다. 그러나 나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낙도가는 연락선> 은 아무래도 너무 '올드'한 느낌이 들고 사람들이 기억하기에도 부적절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낙도가는>
그래서 작사한 정두수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제목을 변경하자고 제안을 했다. 임 사장, 박춘석씨 등 모두 다 내 말에 수긍했고 다행히 정두수씨도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이제는 제목을 바꾸자고 제훌?내가 대안을 제시할 차례가 되었다. 노래 제목이란 머리를 싸매고 앉아서 고민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노래를 자꾸 부르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 나는 그 노래를 계속해서 흥얼거렸다.
그러는 도중 문득 생각난 것이 '가슴 아프게'였다. 더구나 노래 속에 '가슴 아프게'가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고 대중들이 외우기 쉬울 것 같아서 그걸 제시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다섯 명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만장일치로 결정을 했다. 10여분 만에 제목이 바뀐 것이다. <낙도가는 연락선> 은 사라지고 <가슴 아프게> 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가슴> 낙도가는>
남진의 대표곡인 이 노래는 일사천리로 취입을 마쳤다. 그리고 시판을 하기 전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대중들의 반응을 조사했다. 방송 된지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인기는 가히 선풍적이었다.
지구레코드사는 그 때부터 모든 직원들이 밤을 새워 가며 12인치 LP 디스크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레코드 총판점은 현금을 들고 와서 디스크를 받아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방송국에서 남진을 섭외하느라고 바빴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극장들이 남진을 초대하려고 불을 켰다. 1966년 초의 일이다.
<남진 이야기 계속>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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