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직접적 동기는 유서에서 암시한 대로 자신과 주변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적 압박과 이후 전개될 상황에 대한 모멸감과 중압감이었을 것이다. 가족과 측근이 실타래처럼 엮였지만 본인은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관계를 들이대며 '포괄적 뇌물죄' 기소를 기정사실화한 검찰과 그 뒤의 권력, 자신을 거의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 보수언론과 극언을 퍼붓는 극우세력, 재판과정에서 구차하게 다퉈야 할 혐의와 이로 인한 자신과 주변의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은 그를 불면의 밤으로 이끌었을 법하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이 점에서 안희정씨 등 측근들이 억울함을 토로하며 권력과 언론의 책임을 따지는 것이나 야당이 "누가, 무엇이, 왜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를 맞게 했는지 국민과 역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또 봉하마을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빈소를 찾는 추모행렬이 장사진을 이루는 데는 충격과 애도 이상의 다른 기류가 분명히 있다. 정부가 정치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을 이런 잣대로만 보면 길게 이어갈 얘기가 없다. 기껏해야 죽은 권력과 산 권력의 게임이라는 낡은 프레임 속에서 검찰의 과잉 혹은 일탈 수사만 도마에 오를 뿐이다. 정권의 강퍅한 정국 관리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초점이 분명치 않다.
전직 국가지도자의 죽음이라는 비통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 원인이 된 사실의 전후관계나 상황이 바뀐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개인적 억울함이나 권력의 비정함을 꼬집기보다 운명을 탓하며 원망마저 떠안고 간 것은 그런 까닭일 게다.
그렇다면 프레임을 바꿔 볼 필요가 있다. 지지자들에겐 '바보'였고 반대자들에겐 '이단'이었던 노무현이라는 인간, 그리고 그의 삶과 이 땅에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를 찬찬히 재조명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재임 시절에는 지역주의ㆍ권위주의ㆍ기득권 타파와 균형 발전 남북화해를 위해 거칠게 달려갔고, 퇴임 후엔 개방-공유-참여-책임의 시민민주주의의 정착에 열의를 쏟았던 그를 진정 기억하는 길이다.
사실 1980년대 말 인권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청와대에 들어가기까지 고인의 삶은 명분과 가치를 위해서라면 이른바 '정치적 자해 혹은 자살'에 비유되던 결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기질이 종종 시대와 불화를 빚고 큰 파열음을 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진정성이 의심 받을수록 더욱 내달렸다. 2007년 초 대통령 4년 연임제의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할 때 토한 말을 들어보자. "…자꾸 정략, 정략 얘기하는데, 1990년 3당 합당 때 안 따라간 것도 정략이냐, 92년 14대 총선 때 모두가 당선 안 된다고 하던 부산에서 출마한 것도 정략이냐, 95년 경기도지사 선거 여론조사에서 수 차례 1위 했지만 도리를 좇아 (불리함을 무릅쓰고) 부산에서 출마했다, 98년 종로 보선에서 당선된 뒤 2000년 4월 총선 때 다시 부산으로 갔다, 2004년 탄핵파동은 한나라당 스스로 함정에 뛰어든 것 아니냐…."
그래서 그가 검찰 출두를 앞둔 시점에 지지자들에게 "노무현은 더 이상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고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듣고 싶지 않았다. '노무현 시대'를 만들고, 싫든 좋든 함께한 국민들 앞에서 자신의 짐을 너무 쉽게 벗어 던지는 것 같아서였다. 또 노무현 5년을 신기루로 만들면 우리 모두가 너무 초라해져서다.
더 큰 짐과 과제를 남기고
노 전 대통령이 정치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몸을 던진 것은 결국 이런 짐에 대한 자책감과 무력감 때문이라고 여겨지지만 오히려 그는 더 큰 짐과 과제를 남기고 떠난 셈이다. 섣불리 정파색을 드러내거나 또는 무조건적 울분과 냉소에 젖어 그의 죽음을 함부로 재단하면 안 되는 이유다.
그래도 가슴 속 응어리를 풀지 못하는 측은 고인이 마지막까지 천착한 시민민주주의론을 다시 읽어보고, 죽음마저 오발탄이라고 비하하는 측은 1년 전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을 되새기길 바란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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