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외모에서 그의 다부진 각오를 읽을 수 있었다. 뮤지컬계에서 '코믹 연기의 달인'으로 불리는 배우 김성기(44)는 트레이드 마크였던 풍성한 곱슬머리를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삐죽 설 만큼 짧게 깎았고, 17년 간 고수해 왔던 수염도 밀어 버렸다.
'레인맨'(6월 2일~8월 2일 대학로 SM아트홀)의 자폐증 천재 레이몬드 바비트 역으로, 데뷔 20년 만에 처음으로 뮤지컬이 아닌 연극에 출연하는 까닭이다. 그는 현재 이 역으로 무대에 서고 있는 임원희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익힐 춤도, 노래도 없고 상황과 대사만 외면 되는데 부담은 더 크네요. 자칫 잘못하면 관객에게 레이몬드가 아닌 인간 김성기가 보일 수 있거든요." 자폐증을 앓는 형 레이몬드와 일 중독인 주식 트레이더 동생 찰리의 관계를 통해 형제애를 전하는 '레인맨'은 동명 영화(1988)를 무대화한 작품. 더스틴 호프만이 명연기를 펼친 역할이 바로 레이몬드다.
"최근에 뮤지컬에서 코믹한 조역을 연달아 맡다 보니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말도 몸도 구기고 애드리브도 많이 넣었었거든요. 지금은 정반대의 훈련을 하고 있는 셈이에요. 자기 틀 안에 갇혀 있는 레이몬드는 한 치의 대사 실수도 용납이 안 되는 배역이니까요."
지난해 그가 연기한 '벽을 뚫는 남자'의 닥터 듀블, '미녀는 괴로워'의 이공학 박사, 지난달 끝난 '기발한 자살여행'의 인명구를 기억하는 관객에게는 뜻밖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그는 레이몬드와의 인연을 운명으로 믿고 있었다. 라이선스 계약 과정이 지연되면서 늦어진 것일 뿐 이들 뮤지컬보다 더 먼저 제안을 받은 작품이 연극 '레인맨'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길에 들어선 계기를 설명할 때도 그는 운명론자 같은 말투를 이어갔다. "고등학생 때 성악과 지망생인 짝꿍을 따라 얼떨결에 음악 공부를 시작해 한양대 성악과에 진학했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진로를 못 정하고 방황하고 있었어요. 합창단에 들어가기는 싫고 유학을 떠날 형편도 못 돼 혼자 고민하다 뮤지컬 '돈키호테'의 포스터를 보고 이거다 싶었죠. 그렇게 해서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과 서울예술단원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왔어요."
물론 배우의 길이란 게 시작부터 순조로웠을 리 없다. 그의 데뷔작은 뮤지컬 '양반전'(1989). "아직도 굳이 꼽으라면 연기보다는 노래가 자신 있다"는 그이지만 솔로곡은커녕 대사조차 "대감마님 서찰이요"하는 외마디뿐인 배역이었다. 실력만큼이나 연공서열도 중요했던 시절, 캐스팅 기회가 자주 오지 않는 현실에 좌절해 배우의 꿈을 접었던 적도 있다.
서울시립가무단을 그만 둔 후 1년 반 동안 포장마차를 운영하기도 하고, 서울예술단을 나와 프리랜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엔 도예촌에서 도자기 굽는 일을 8개월 동안 하기도 했다. 그래서 건강을 돌볼 틈 없이 바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요즘이지만 불러주는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무대는 성전이기에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한 사람만 서는 장소라고 믿는다"는 그는 레이몬드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 "약간은 좋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관객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부분이 제 외모가 아닌 연기가 돼야 하니까요.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텍스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열심히 찾는 중이죠." 한시도 대사를 놓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손동작이 커질 때마다 손바닥에 까맣게 적힌 대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연 문의 (02)2051-3307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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