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개는 육수가 생명이에요. 바짝 졸아들면 '물 더 부으면 되지'하는 생각이 음식을 망쳐요."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성북구 장위1동 주민센터 조리실. 강사 김자경(43ㆍ여)씨가 김치찌개 만드는 법을 조곤조곤 일러주자, 머리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수강생들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받아 적기 바쁘다.
"자 이제 한 번 만들어 볼까요." 강사의 주문이 떨어지자, 서툰 칼질 따위로 조리실 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진다. "파, 고추는 언제 넣어요?" "간은 어떻게 맞춰야 하죠?" 귀 쫑긋 세우고 들었건만 여기저기서 이어지는 SOS 요청에 강사도 덩달아 바빠진다.
평생 주걱 한 번 들어본 적 없던 할아버지들이 아내를 위해,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앞치마를 둘렀다. 성북구가 이달 4일 문을 연 3기 '실버남성 요리교실' 수강생 42명 가운데는, 멀리 강남과 경기 안양에서 원정 오는 이들도 있다.
7월까지 12주간 매주 월요일 요리교실이 열리는데, 수강료는 따로 없고 재료비 8만원만 내면 된다. 비용도 저렴하지만, 거창한 '요리'보다는 두부조림이나 꽃게탕, 된장찌개 등 집에서 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 조리법을 알려준다는 것이 인기 비결이다.
이날 김치찌개에 이은 메뉴는 미역콩전. 이름은 생소하지만 흔한 식재료인 콩과 미역, 밀가루를 이용한 부침개다.
서툰 솜씨로 끓이고 볶고 부치기를 3시간여, 제법 그럴듯한 음식이 완성됐다. 음식을 맛보며 나누는 대화도 대개는 음식 얘기다. 지난 주 배운 요리를 가족에게 선보여 점수를 땄다는 자랑, 조리접을 그새 잊어버려 "맛없다"는 핀잔만 들었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일부는 가족에게 맛 보이기 위해 남은 전을 싸 가기도 했다.
이들은 황혼에 앞치마를 두르게 된 이유로 가정의 화목을 첫 손에 꼽았다.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군림'만 하던 자신을 버리고 앞으로는 가족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이 묻어났다.
특히 자신을 위해 요리 하는 남편을 본 아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란다. 수강생 중 최고령인 성수형(84)씨는 "그날 배운 요리를 집에서 만들어주니 마누라가 정말 좋아한다. 말도 잘 통해 요즘 참 살 맛난다"고 말했다. 심성용(68)씨도 "아내와 함께 음식을 만들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홀로서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요리교실로 이끈 경우도 있다. 아내와 사별한 김모(76)씨는 "밥은 할 수 있지만 늘 마땅한 반찬이 없어 입맛이 사라진 지 오래"라며 "한끼를 먹어도 제대로 먹고 싶어 요리를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라면 끓여 본 적도 드물다는 안병호(65)씨의 요리 도전도 자신을 위해서다. 4개월 전 위암 초기로 위 절제수술을 받은 뒤 건강식을 스스로 챙겨 먹자고 마음 먹었단다. "건강도 챙기고 평생 남편과 자식 위해 헌신한 아내에게도 보답해 볼 참이에요."
강사 김씨는 요리교실의 인기 비결에 성취감을 보탰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과 가족들의 좋은 반응이 어르신들을 조리대 앞으로 이끄는 것 같아요. 깜빡 잊은 조리법을 물어 보려고 전화도 자주 걸어와요. 열정이 참 대단하세요."
실버남성 요리교실은 지난해 10월 문을 열어 1기 25명, 2기 30명이 거쳐갔다. 매 기수 정원을 늘리지만 대기자가 넘친다. 성북구는 4기 과정부터는 한 반을 더 늘릴 계획이다.
김종한 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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