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 니스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가 생의 마지막 12년을 살았던 곳, 카뉴쉬르메르(Cagnes-sur-Mer)에 닿았다. 맨 먼저 마주친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따뜻한 지중해의 바람. 류머티즘으로 팔 다리가 마비되는 고통을 겪던 말년의 르누아르가 카뉴쉬르메르로 찾아든 이유이기도 하다.
길을 물어볼 사람조차 없는 한적한 마을의 오르막길을 따라 10여분을 걷자 울창한 올리브나무 사이로 회색 벽돌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는 르누아르미술관이 된, 르누아르의 집이다.
■ 르누아르의 숨결 깃든 카뉴쉬르메르
르누아르는 1890년대 이후 대중적 명성과 경제적 안정을 얻은 대신 고통스러운 질병과 맞닥뜨렸다. 화가에게는 치명적인 류머티즘이었다. 1898년 동료 화가인 페르디낭 드콩쉬의 추천으로 카뉴쉬르메르를 처음 방문한 르누아르는 1907년 레콜레트라는 언덕 위의 사유지를 사들여 집을 짓고 완전히 이주했다.
병 치료가 목적이었지만, 르누아르는 그곳의 아름다운 풍광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고 그것을 다시 작품으로 옮겼다. 그래서 그의 말년 그림은 마치 유토피아를 그린 듯 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카뉴쉬르메르 시는 1960년 르누아르의 막내아들 클로드로부터 이 집을 사들여 르누아르미술관으로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 병마도 막지 못한 열정
집의 1층은 응접실과 부엌, 게스트룸 등으로 이뤄져있고, 2층이 르누아르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다. 르누아르의 방에 놓인 유리 진열대 속에는 회색빛 코트와 지팡이 2개가 나란히 들어있다. 코트 여기저기에 묻은 색색의 물감 자국이 코트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방 오른쪽에 있는 공간이 그가 그림을 그렸던 아틀리에다. 짧은 심호흡을 하고 들어선 그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나무 휠체어였다. 이곳으로 이주할 당시 이미 혼자 걷지 못했던 르누아르는 점차 병이 악화돼 휠체어에 몸을 맡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큰 열정을 불태웠다.
손의 떨림을 막기 위해 헝겊을 손 사이에 말아넣고 그 사이에 붓을 끼워 고정시킨 채였다. 붓을 바꾸려면 누군가가 그의 마비된 손가락을 벌려주어야 했다. 그렇게 카뉴쉬르메르에 살았던 12년간 남긴 작품이 무려 800여점. 그는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 이젤, 붓, 팔레트 등 그의 숨결이 깃든 화구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 행복한 그림의 원천은 가족
르누아르에게 가족은 중요한 모티프였다. 그는 아내 알린느의 충실한 남편이었고, 세 아들의 둘도 없는 아버지였다. 그의 집 곳곳에서도 그런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부엌의 테이블과 찬장, 벽난로 등 집에 놓인 가구들은 특이하게 모서리 부분이 모두 둥글다.
"이사 당시 7세였던 막내아들이 다칠까봐 염려한 르누아르가 직접 주문해 제작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가이드의 뒤로 르누아르가 그렇게 사랑한 막내 아들을 그린 '책 읽는 코코'가 보인다.
훗날 도예가가 된 코코의 도자기 역시 이곳에 전시돼있다. 영화계 거장이자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인 장 르누아르의 도예 솜씨도 함께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둘의 작품 모두 색감이 화려하다.
아내 알린느의 방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를 형상화한 조각이 놓여있다. 알린느와 장남 피에르의 모습이다. 르누아르는 평생 그와 함께했던 알린느가 1915년 세상을 떠나자 이 조각을 만들면서 아픔을 달랬다. 자신은 손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르누아르의 스케치와 지시를 바탕으로 조수가 제작했다.
■ 지상낙원을 꿈꾼 화가
르누아르가 카뉴쉬르메르에 자리를 잡은 후 수많은 사람들이 노화가를 찾아왔다. 화상인 폴 뒤랑 뤼엘, 후배 화가 알베르 앙드레 등 고정적인 손님들 외에도 앙리 마티스, 피에르 보나르, 모딜리아니 같은 예술가들이 그를 찾아와 교감했다. 피카소는 이곳을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르누아르의 후기 작품을 여러 점 소장했으며,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초상화를 그려 존경을 표했다.
보나르가 특히 좋아했다는 집 밖의 정원으로 나갔다. 봄 햇살을 받은 올리브나무와 소박하게 피어있는 색색의 꽃 사이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카뉴쉬르메르의 붉은색 지붕들 너머로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반짝이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서 넘실대는 빛과 환희, 여유와 평화를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르누아르미술관 큐레이터 주르니약
평일 오후인데도 르누아르미술관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11점이 전부인 시골 마을의 작은 미술관이지만, 르누아르의 흔적을 가까이서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카뉴쉬르메르 시가 운영하는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 비르지니 주르니약은 "프랑스 전역을 비롯해 일본, 미국, 이탈리아 등에서 1년에 4만여명의 사람들이 찾아온다"며 "서울 전시 이후로는 한국인 관람객도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웃었다.
주르니약은 카뉴쉬르메르 이주 이후가 르누아르의 예술세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이미 화가로서 성공을 거둔 다음인데다 화상들과 지리적으로 멀어지면서 어떤 강요 없이 자신의 취향대로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된 거죠. 오르세미술관이 한국 전시가 끝난 직후인 9월 이 시기를 조명하는 대형 전시회를 파리 그랑팔레에서 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르누아르의 말년 그림은 멈춰 있지 않았다. 1870년대 작품이 인상주의, 1880년대 작품이 윤곽선을 강조한 전통적 스타일이었다면, 말년에 그는 인상주의와 고전주의를 종합한 새로운 화풍을 보여준다. 주르니약은 "르누아르는 아주 현대적인 정신을 가진 작가였기 때문에 마티스나 피카소도 좋아했던 작가"라고 설명했다.
르누아르는 말년에 예술적으로 큰 성취를 거뒀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련이 많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간 두 아들이 큰 부상을 당한 채 돌아왔고, 1915년에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병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한 순간도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주르니약은 "그는 어쩌면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르누아르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림으로써 고통을 뛰어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를 '행복의 화가'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일 겁니다."
카뉴쉬르메르(프랑스)=글·사진 김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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