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지축을 박차고 자 포효하라 그대. 조국의 영원한 고동이 되리라." 지난 14일 오후 8시 서울 성북구 고려대 대강당 앞. 조지훈 시인의 호상비문(虎像碑文)에서 가사를 딴 응원가 '민족의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응원단 동작부원들은 노래가 끝나면 주변 200m를 전속력으로 뛰었다.
이러길 2시간째니 꼬박 2.4㎞를 내달린 셈. 바로 옆 컨테이너 건물에서는 음악부원들의 연주 연습이 한창이다. 이들은 스스로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응원제'로 자부하는 '입실렌티' (21일)를 앞두고 매일 밤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15일 연세대 응원제 '아카라카'가 열린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노천극장에는 빗줄기가 쏟아지는데도 1만4,000여명이 운집했다. 연세대 응원단은 이 행사를 위해 3월 말부터 매일 오후 4시간씩 연습에 매달렸다. 공연 직전 2주일간은 밤 11시까지 훈련이 이어졌다. 행사 당일에는 무대에 설치한 장비를 지키느라 밤잠을 설친 채 무대에 올랐다.
신입단원 조윤형(19)씨는 "바로 코 앞에 사람들이 떡 하니 있어 거의 무아지경 속에서 몸짓을 펼쳤다. 처음 보는 사람도 하나가 되는 게 바로 아카라카의 매력"이라고 했다.
대학 응원제의 백미로 꼽히는 연세대 '아카라카'와 고려대 '입실렌티'. 응원 구호에서 이름을 딴 행사는 동아리 공연, 초청가수 무대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지지만, 백미는 낯선 이들끼리도 기꺼이 어깨 걸고 하나가 되는 응원전이다. 재학생은 물론 옛 추억을 되새기려는 졸업생, 새로운 응원문화를 접하려는 타 대학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응원단은 힘들어. 군대보다.' 고려대 응원단의 컨테이너 건물 벽면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낙서다. 백령도에서 해병대 생활을 한 단원이 휘갈겼다고 한다.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인 김승훈(26)씨는 "5개 운동부 친구들도 '너네들이 더 빡세다'고 하더라"고 했다.
특히 9월 두 학교의 정기전을 앞두고 2, 3개월간 이어지는 여름 훈련은 말 그대로 '지옥 훈련'이다. 고려대는 낙산 해수욕장에서 설악산 대청봉까지 쉬지 않고 달리기, 연세대는 신촌에서 경기 양평까지 자전거 질주를 하기도 했다. 이한별(23) 고려대 응원단 부단장은 "뙤약볕 아래서 달리다 바닥에 고인 물만 봐도 반가웠다"고 했다.
목구멍에 단내 나는 훈련도 마다하지 않고 응원단에 청춘을 쏟는 이유는 뭘까. 연세대 응원단 김준기(22)씨는 "누나 둘이 연세대 출신이지만 입학 초에는 사실 애교심이 없었는데 응원단의 노래를 듣는 순간 자부심이 꿈틀대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고려대 신입단원 최지현(20)씨는 "여자여서 군대도 안 가는데 응원단을 통해 좀 더 힘든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힘들게 교정을 뛰다가도 지나는 학우들이 응원곡을 따라 불러주면 눈물도 나고 힘도 난다"고 했다.
신입단원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정기전까지는 버틴다"는 말을 달고 산다. 그만큼 고연전 혹은 연고전은 이들의 존재 이유다. 임은지(23) 고려대 부단장은 "떨릴 정신조차 없다. 정기전 마지막 날 '흰 장갑에 실려간 꽃다운 대학생활'이라는 단가를 부르면 열이면 열 모두 눈물을 쏟는다"고 했다.
김민정(20) 연세대 단원도 "1만여명이 푸른 옷을 입고 응원단의 동작에 따라 똑같이 움직인다고 생각해보라. 소름이 돋을 정도다"라고 했다. 응원단 선배는 정기전을 끝내고서야 비로소 후배의 이름을 불러준다고 한다.
그만큼 응원단의 신입 경쟁률도 높다. 남자 단원은 보통 4대 1, 여자 단원은 6대 1에 달한다. 고려대 응원단은 인간성, 끼, 체력을 주로 보는데, 팔 굽혀 펴기의 경우 지원자 수의 10배를 해야 통과된다.
두 학교 모두 중시하는 것은 끝까지 갈 수 있는 '열정'이다. 연세대 단장 출신 김승훈씨는 "100m 달리기도 버거워 하던 여학생을 매일 응원단을 찾아오는 열정만 보고 뽑았는데 무사히 정기전까지 치러내는 걸 보고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맞수의 신경전은 각기 다른 응원 용어에서도 드러난다. 고려대에서는 율동을 '동작'이라고 하는 반면, 연세대는 '폼'이라고 부른다. 연세대서는 '파도'라 부르는 응원 형식이 고려대에서는 '물결'로 칭한다.
단장의 지휘를 일컫는 용어(conduct) 역시 고대는 '콘닥', 연대는 '컨덕'이라고 한다. 한 응원단원은 "똑 같은 것은 싫다. 타교가 좋은 것을 개발했다 해도 따라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해마다 지적되는 상업성 논란에 대해서도 이들은 할 말이 많다. 2007년 입실렌티 총기획을 맡았던 이재국(25)씨는 "가수의 출연을 기대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 문제는 연예인이 응원제를 축하하는 수준을 넘어서 축제를 주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5일 '아카라카'를 마치고 목이 잔뜩 쉬어버린 윤종호(24) 연세대 응원단장은 "늘 그렇듯 아쉬움이 남지만 1만여명 학생들의 미소와 열정이 빗속에 번져가는 것을 행복했다. 연고전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고 말했다.
'입실렌티'를 앞둔 박영국 고려대 응원단장(25)씨는 "고대 2만 학우들이 있기에 응원단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된 고대의 모습을 즐길 수 있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장재용 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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