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친구가 성직자가 되었다. 1년에 한 번 단 며칠뿐인 귀한 부활절 휴가를 이용하여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온다. 이번에도 고향의 어머니를 뵙고 온 후 친척, 친구, 남매들과 안부를 교환하고 다시 돌아갈 참이다.
우리는 이번 만남을 조금 특색있게 해보려고 요새 한참 화제를 몰고 다니는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기로 했다. 유니폼 대신에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누가 봐도 친구와 함께 경쾌한 걸음으로 영화관을 찾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 친구는 우스개 소리도 곧잘 할 줄 알았다.
어떤 수녀님이 지인들의 초대로 모처럼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야하기로 소문난 '색, 계'라고 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고 한다. 민망한 대목이 언제 나올지 몰라 긴장하다가 영화가 끝났단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 영화가 부담스럽다고들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티켓을 다시 확인해 보니 '식객'이었단다.
우리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뱀파이어가 된 남자 주인공이 표현하는 고뇌가 피처럼 철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성직자의 차원과 노총각 인간의 차원, 그리고 식성이 다른 변종 인간의 차원이 중층적으로 한 몸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마침내 몸이 시커멓게 타버리는 광경으로 끝났다.
우리는 점심식사 전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는 성(性)이라는 화두를 펼치는 방식이 프랑스 영화처럼 매우 심리적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성을 절제하고 통제하지 못했을 때 뱀파이어처럼 추락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화신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한 굳이 '성직자'에 초점을 맞출 필요 없이 인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삼사년 사이 춤 치유 강습을 받았던 경험을 들려준다. 춤사위에 몰입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추다 보면 어느 순간 사면의 벽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 번데기에서 나와 막 나비가 되고 있는 모습, 큰 바다 한 가운데 고기처럼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더라고 한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요샌 딱히 추고 싶은 욕구가 없어져서 한동안 춤을 추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 친구가 몸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해낼 수 있는 통로로서 춤이 성에 구속되지 않는 삶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렇지만 질문이 남았다. 성 관련 대학교 수업에서 한 남학생이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선생님들은 자꾸 농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로 풀라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같으냐고 반문하던 모습도 상기된다고 내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의 모습을 잘 그리기 어렵다. 성을 인간적 대화의 소중한 매개체라고 보는 견해와 단지 생물학적 해소책이라는 견해를 양끝으로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우리 각자는 그 사이의 어떤 지점에 선 채로 남들은 어떤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보통 사람들'이 아니어서 세인들의 기대와 그 기대가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 갇히기 쉬운 조건이라면 욕망에서 자유로운 주체와 시선의 노예 사이에 확연한 구분을 긋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진다. 짧은 대화를 통해 잠정적으로 확인된 견해차 덕분에 우리는 그 주제에 관해 앞으로도 계속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1년 후에 봅시다"라는 말을 하고 그 분은 떠나갔다.
윤혜린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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