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1752~1800)의 진솔한 면모를 보여주는 18세기 비밀 편지 297통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성균관대는 정조가 당시 집권 세력이던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우두머리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사신(私信)들을 수록한 <정조어찰첩> (전2권)을 간행했다고 18일 밝혔다. 정조어찰첩>
이 편지들은 2월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 의해 일부가 번역ㆍ공개돼, 정치적 술수를 서슴지 않는 다혈질 군주 정조의 모습을 드러내며 충격을 던졌다.
<정조어찰첩> 에는 전체 편지의 실물 사진이 탈초ㆍ번역ㆍ윤문 과정, 해제와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의 출간으로 '개혁군주', '호학군주'의 이미지에 가려진 정조의 맨얼굴을 일반인들도 직접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성균관대는 원문과 번역문만을 1권짜리 단행본으로 엮은 보급판도 함께 간행했다. 정조어찰첩>
■ 흥분 잘하고 조급했던 '워커홀릭' 정조
<정조어찰첩> 에는 2월 발표에서 제외됐던 편지들도 번역을 마치고 수록됐다. 1798년 3월 17일에 보낸 편지에는 "이놈의 혈기가 끓어올라 막지 못한 것인데, 그 뒤 생각해보니 화가 난 나머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껄껄"이라고 적혀 있다. 정조어찰첩>
18일 열린 <정조어찰첩> 간행 기자간담회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임금이 스스로를 '이놈(此漢)'이라고 표현한 점도 흥미롭고, '껄껄(好呵)'과 같은 표현을 거침없이 쓴 것도 예외적"이라고 밝혔다. 정조어찰첩>
정조는 자신의 다혈질 기질을 숨기지 않는다. <정조어찰첩> 에는 "나는 태양증(太陽症)이 있어 부딪치면 바로 폭발한다", "옳지 못한 일을 보면 화가 치밀어 얼굴과 말로 나타난다"와 같은 정조의 말이 담겨 있다. 이런 다혈질 성격은 병조판서를 지냈던 인물을 바로 국문장으로 보내고 직접 욕설을 퍼부으며 다그치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정조어찰첩>
그러나 안 교수는 이런 성격으로 미루어 정조를 폭군으로 파악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조는 화를 내더라도 바로 균형감각을 되찾는 편이었으며, 정조 시대에는 정치행위로 인한 처벌이 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정조어찰첩> 은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철저히 정치적 행위였다는 점을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벽파 세력이 정조가 감싸는 남인 세력을 '강상윤리가 무너진 자들'이라고 공격하자, 정조가 벽파가 소품 문학(소설 등)을 즐긴다는 점을 빌미 삼아 문체반정이라는 반격 카드를 꺼냈다는 해석이 유력했다. 정조어찰첩>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정조는 비속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등 문체반정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설명하고, "정치적 수단으로 실시한 문체반정이 사대부의 자기검열 등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 "정조의 사인은 분명한 병사"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어찰첩 공개 이후 분분했던 정조 독살 논란을 '병사' 쪽으로 확실히 정리했다. 안 교수는 "2월에는 어찰첩이 정조 독살설의 진위를 가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발표했으나, (전체 번역을 끝낸) 지금 보면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편지들은 정조가 노론 벽파와 적대적 관계가 아니었으며, 적어도 정치의 한 부분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황 등 독살설을 반박하는 수많은 증거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25일 발행될 예정인 '역사비평' 여름호에서도 독살설에 대해 "사료를 오독하고 왜곡한 주장"이라는 논지를 편다. 그는 '어찰의 정치학: 정조와 심환지'라는 논문을 통해 "이덕일씨 등이 정조 독살설의 근거로 '오회연교'를 거론하는 것은 실록을 잘못 읽은 결과"라고 주장한다.
안 교수는 "1800년 5월 30일 정조가 조정 인사의 원칙을 천명한 오회연교는 남인과 시파를 등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벽파를 등용하겠다는 의도의 표명"이라고 설명한다. 오회연교 천명으로 위협을 느낀 벽파가 독살을 감행했다는 해석은 자가당착이라는 것이다.
진재교 교수도 독살설을 반박했다. 그는 "어찰을 보면 정조는 1970년대 초부터 지금의 대상포진과 비슷한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으며, 의학 지식이 깊었던 정조는 약의 조제, 침 처방, 그리고 독살의 정황 증거로 지목되는 연훈방(수은 치료)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나온다"고 설명했다.
진 교수는 또 " '정치 10단'인 혜경궁 홍씨(정조의 모친)도 정조의 병사에 별 의문을 갖지 않은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정조는 오랜 시간 동안 지병이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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