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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경림, 자전 에세이 '못난 놈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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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경림, 자전 에세이 '못난 놈들은…'

입력
2009.05.18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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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農舞)'의 시인 신경림(74)씨. 그를 통과하지 않고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축인 민중적 리얼리즘의 시세계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터이다. 시로 일가를 이룬 그이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꼭 극복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누구일까?

신씨의 기억은 60여년 전 고향 충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 공부도 곧잘하고 글솜씨도 뛰어났던 소년은 6학년 가을 전도(全道) 초등학생 문예작품 전시회에 시를 출품했고, 조금도 당선을 의심하지 않았다. 구름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며칠을 보낸 뒤 맞이한 조회시간. 그는 귀를 의심했다.

교장 선생님은 당선자로 산문을 써 보낸 다른 아이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 신씨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의 아버지는 신씨 집안의 산지기이자 소문난 술주정뱅이였고, 아이는 공부도 잘 못했다.

소년은 다시는 글 따위는 쓰지도 읽지도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신씨는 그 후 그 아이가 남몰래 말똥종이 여러 권에 소년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 쓰며 문학적 담금질을 해온 사실을 알게 됐으며 그를 은근히 두려워하고 존경하기까지 하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그가 자전적 에세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문학의문학 발행)에서 들려주는 추억 한 토막이다.

<못난 놈들은…> 은 신씨의 초등학교 시절 회상기인 1부와, 그가 문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부터 교우했던 문인들과의 추억담인 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 신씨는 일제시대 말기에서 해방 전후에 걸쳐있는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다.

친구들과 병정놀이를 하다가 미영군(美英軍) 역할을 맡게 되면 울음을 터뜨리고 도망갔던 일, 체구가 작아 달리기를 하면 맨꼴찌를 도맡아 '맨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일, 고시 준비하는 백수 외삼촌을 판사라고 소개했다 들통 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던 일, 군것질을 하기 위해 술 취한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지던 일 등. 아직도 동안인 노시인은 독자들이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할 만한 추억담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옛날에 전화가 있었나, 휴대폰이 있었나, 노상 만나서 술도 많이 마셨지. 군사정권 때라 체제에 대한 반감이 많아 문인들의 유대감도 남달랐어."

기자와의 통화에서 잠시 회상에 잠긴 신씨. 책의 2부는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세상에 대한 비분강개와 문학에 대한 열정만은 하늘을 찔렀던 시인과 작가들의 이야기다. 신씨가 들려주는 '문단 기인열전'이라고 부를 만하다.

새해 인사차 미당 서정주 시인의 집을 찾아가 미당의 행적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다 막걸리 주전자로 얻어맞은 김관식 시인, 버스나 전차를 타고 가다 느닷없이 호주머니에서 자작시를 꺼내 읽어 차 안을 시낭송장으로 만들던 백시걸 시인,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사는 길 없을까 궁리하다 노상에서 기타 치며 화장품을 팔러 다녔던 임종국 시인, 필화사건을 겪은 뒤 시를 접고 바둑과 침술에만 몰두했던 신동문 시인 등 때로는 배꼽을 쥐게 하는, 때로는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얼굴만 봐도 흥겨웠던 못난 놈들' 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 조태일 시인과 소설가 이문구에 대한 신씨의 추억은 각별하다. 1980년 5월 계엄 확대로 종로경찰서에 끌려간 신씨는 조태일 시인과 수갑을 함께 찼다고 한다. 덩치가 산만한 조태일 시인 옆에 선 단구의 그를 보고 형사들은 "이거, 고목에 매미가 붙은 거여, 코끼리하고 생쥐가 한 끄나풀에 묶인 거여!"라고 한 마디씩 했단다.

작은 수술을 받기 위해 위암 선고를 받은 이문구와 같은 병동에 입원했을 때의 일화도 들려준다. 부인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입원실에 찾아온 이문구의 목소리는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지만, 제 몸 걱정 대신 "수술이란 몸에서 병든 곳을 잠시 도려내는 것"이라며 오히려 신씨를 위로하기 바빴다는 것이다.

에세이집의 제목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로 시작되는 신씨의 시 '파장(罷場)'에서 따온 것. 시집 <농무> 에 수록된 시다.

신씨는 책 머리에 "두 글을 쓴 것은 하나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도 앞서 산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공부하며 자랐는가를 알았으면 해서였고, 또 하나는 오십여년 전 문단의 풍속도를 아는 것이 우리 문학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였다"라고 썼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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