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주시 광적면 덕도삼거리 인근 56번 국지도. 2002년 6월13일 신효순ㆍ심미선양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열 네 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곳이다. 당시 미군의 무성의한 대응이 국민적 공분을 불렀고, 사고를 낸 미군들에게 면죄부를 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 행렬이 전국 곳곳에서 타올랐다. 촛불 집회란 새로운 문화는 여기서 싹텄다.
효순ㆍ미선양 7주기를 한 달 앞둔 13일 사고 현장을 찾았다. 추모비 앞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꽃들이 따가운 봄볕에 시들어가고 있었다. 사고가 난 왕복 2차로의 갓길은 보도블록을 깐 인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인도 폭이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데다 길이도 짧아 파주 쪽으로 가려면 그날의 효순이, 미선이처럼 갓길을 위태롭게 걸어야 한다.
더구나 경사 지고 구불구불한 차도엔 화물 트럭 등 대형 차량들이 여전히 시속 70∼80km 속도로 달리며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이 일대 하루 평균 통행차량 1만3,097대 가운데 절반 이상이 대형 화물차이고, 10% 가량은 군부대 차량이다. 주민 이모(57)씨는 "4월이나 10월 집중훈련 기간에는 낮에도 탱크나 자주포, 장갑차 등이 무리 지어 오간다"라고 말했다.
효순ㆍ미선양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합심해 추진한 국지도 56호선 확포장 공사가 수년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당초 지원을 약속했던 정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예산 지원을 줄였기 때문이다.
경기도가 56번 국지도 파주시 법원리-양주시 상수리 간 10㎞를 2차로에서 4차로(폭 20m)로 넓히고 굽은 구간은 직선화 하는 공사에 나선 것은 2005년 3월. 당시 손학규 경기지사는 계획 단계였던 이 공사를 조기에 추진키로 하고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촛불 열기에 놀란 정부는 예산 지원을 약속했고, 도는 2010년 10월 완공 목표로 공사에 들어갔다.
첫 두 해는 무려 484억원을 들여 토지보상에 나서는 등 빠르게 진척됐으나 2년이 지나며 사정이 달라졌다. 계획대로라면 매년 160억원씩 국비가 지원돼야 하는데, 실제 국토해양부 지원은 2007년 109억원, 2008년 113억원, 2009년 122억원에 그쳤다. 그나마 올해는 당초 70억원만 배정된 것을 경기도가 "도로건설이 너무 늦어진다"며 읍소해 간신히 52억원을 더 받아냈다.
이 때문에 도로 확포장 공사는 벌여만 놓은 채 지지부진하다. 실제 사고 지점 인근 공사 현장에는 기반석으로 사용될 돌들만 곳곳에 쌓여있을 뿐 굴삭기 등 중장비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사 차량 출입을 위해 닦아놓은 흙길도 텅 비어 있었다.
착공 4년이 지난 현재 공정률은 23%에 불과하다. 계획대로라면 80%에 육박했어야 한다. 이 같은 추세라면 당초 예정보다 5,6년 늦은 2014, 2015년쯤에야 완공이 가능할 전망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경기침체로 세입이 크게 줄어들면서 정부나 지자체 도로 예산 배정액도 줄었다"면서 "56번 국지도만 예산을 배정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 몫이다. 사고가 난 도로는 차량 통행량이 많지는 않지만 좁고 경사진데다 굽은 구간이 많아 늘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올 들어 2월 말에도 양곡을 가득 실은 5톤 화물차가 추모비 앞 도로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마주 오던 차량이나 보행자가 있었다면 또 다시 사망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효순양 아버지 신수보씨는 "경기도와 양주시, 공사 현장 관계자들을 만나 '하루 빨리 공사를 끝내 달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면서 "우리 아이의 희생이 벌써 잊혀진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주민 김모(46)씨도 "사고 이후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그 길로는 다니지 않는다"면서 "정치인을 비롯해 앞 다퉈 현장을 찾아 추모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길래 도로 공사 하나도 약속대로 되지 않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강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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