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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어느 부녀의 5월

입력
2009.05.18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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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지내는 친구의 이야기다. 그는 지난 주 어버이날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딸로부터 카드를 받았다. 깨알 같은 글씨를 넣어 '아버님 전상서' 투의 편지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그에게서 들은 편지 내용을 간추린다.

<사회에 나와 처음 맞는 어버이 날입니다. 초등학교 6년, 중ㆍ고등학교 대학교 4년을 뒤돌아보니 아빠에게 너무나 감사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중학교 2학년 1학기 학교성적표가 나왔을 때입니다. 성적이 너무 나빠 보여드리지 않으려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성적표에 아버지의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전전긍긍하며 성적표를 내밀었습니다.< p>

기어드는 목소리로 "시험을 많이 못 쳤어요, 아빠 사인을 받아오래요" 하면서, 저의 가슴은 마구 쿵쾅거렸습니다. 그 때 아빠께서 "사인만 필요한 거지"하시며, 왼손으로 성적을 가리시고 오른손으로 얼른 사인을 해 주셨습니다. 9년 전 일이지만 그 때 아빠의 미소, 그 순간 안도했던 마음, 그토록 멋있었던 아빠의 사인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잊혔던 행동들이 감사와 상처로

그는 9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돌이켜보니 딸이 중2였는지 중3이었는지 그때부터 좀 달라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기억에 없는 '딸의 감사'가 있었다면, 무심코 안겨준 '딸의 상처'도 있었을 게다는 나의 지적에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엔 자신의 이야기다.

<사춘기와 대학시절을 거치며 딸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러다 남남처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딸이 대학 3학년이던 이맘때쯤 어느 휴일, "아빠랑 둘이서 지리산에 한번 가볼까"라고 제의했다. 서울에서 성산재(노고단 바로 아래) 주차장까지 5시간 가까이 자동차에 갇혀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았다. 못했던 얘기들이 저절로 이어졌다. "사실 나 아빠에게 아주 섭섭했던 일이 하나 있어요"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중학교 2학년 때라고 했다.< p>

학교에서 귀가했는데 참고서와 문제집 등 자신의 책들이 모두 쓰레기통에 처 박혀 있었다고. 일찍 귀가한 내가 딸 책상 위에 값비싼 그것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쌓인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차라리 갖다 버려라'는 생각에 쓰레기통에 던졌나 봐. 울며 쓰레기통을 뒤졌을 어린 소녀의 충격과 상처가 7년 동안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던 모양이야.>

그는 7년 동안이나 자신이 언제 그런 일을 했더냐는 듯 무심하게 지냈다고 했다. 성삼재와 노고단을 오가는 동안, 이어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던 기억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빠 괜찮아요, 이야기를 했더니 이젠 다 풀렸어요"라며 웃어버리던 딸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소원했던 딸과의 관계가 나아진 듯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날 이후였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딸아이에게 그렇게 심각했던 상처와 감사를 7년, 9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는 사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감사와 상처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생겼던 듯 한데, '그런 아빠가 어떻게 그런 짓을' 혹은 짓을 했던 그렇게' 하며 오랫동안 갈등과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감사했던 마음을 되고, 깊은 치유돼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대화와 고백에 더없이 좋은 날들

기억도 못할 정도로 무심코 했던 행동이 깊은 상처로, 혹은 뜨거운 감사로 낙인처럼 남아있는 곳이 가족과 같은 사이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접촉이 잦을수록 상처와 감사는 쉽게 생길 터이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이 모여있는 달이 5월이다. 마음의 상처를 찾아 치유하고, 감춰두었던 감사의 마음을 알려줄 수 있는 대화와 고백에 더없이 좋은 기회들이다. 참 어제 스승의 날, 사제지간도 다르지 않았을 텐데.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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