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 24일(임명장을 받고). 비가 왔다. 이덕재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실장이 찾아와 사표를 쓰라고 한다… 새 청사는 통의동 효자로에 있는 코오롱 빌딩을 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2002년 5월 23일(정든 곳을 떠나며). 도하 전 신문에 그제의 내 비판적 지적이 실리다. 정부를 비판했고, 특히 청와대를 비판해서다… 이어서 바깥 지인들에게 보낸 감사편지도 여기 남긴다.'
김광웅(68) 서울대 명예교수가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쓴 만 3년 간의 일기를 책으로 펴냈다. 매일 아침 출근해 10분 가량 전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꼼꼼히 정리한 기록이다. 200자 원고지로 7,000매 분량인데 <통의동 일기> (생각의나무 발행)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은 그것을 3분의 1 분량으로 추린 것이다. 깐깐한 학자가 정부기관의 수장으로 일하며 겪고 느낀 일들이 실록의 기사처럼 엮여 있다. 통의동>
근자 들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일기를 책으로 묶어냈다는 소식이 이어진다. 최근 출간된 것만 해도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 를 낸 홍지웅 열린책들 대표, <책의 공화국에서> 를 낸 김언호 한길사 대표 등이다.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척지는 위험, 괜한 자기자랑으로 비칠 수도 있는 객쩍음을 무릅쓴 책들이다. 기록을 남기는 데 소홀한 한국의 지식인 사회이기에, 저자의 맨살을 드러내는 책들이 반갑기 그지없다. 책의> 통의동에서>
일기는 개인사의 기록이겠지만 그 개인사의 적층은 곧 역사가 된다. 예컨대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는 16세기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들뿐 아니라 사대부의 살림과 재산증식, 부부갈등, 노후생활 등이 세세히 각인된 필름과 같은 자료다.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조선을 절였던 피비린내는 오래 전에 잊혀졌을지 모른다. 사서의 공식 기록은 현장의 인간이 새긴 핍진을 갈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회고록을 제외하면, 일기 형태의 개인 기록을 출판하는 것은 아직 드물고 또 용감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현대의 역사가들이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나 정원용(1783~1873)의 '경산일록'을 발견하고 흥분하듯, 김광웅이나 홍지웅이나 김언호라는 이름도 후세의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될지 모를 일이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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