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과테말라는 '상춘(常春)의 나라'로 불린다. 기후는 열대성이지만, 1,500m 이상 고지대가 많아 연중 봄 날씨처럼 쾌적해 붙여진 애칭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곳은 결코 상춘의 나라가 아니다.
혹한의 시베리아 벌판보다도 더 춥고 가혹한 땅이다. 전체 인구 1,300만명의 56%가 하루 생계비 2달러(약 2,700원) 미만으로 살아가다 보니 아이들마저 돈벌이에 내몰리고 있다. 과테말라 수도인 과테말라시티 도심 곳곳에서는 학업을 포기한 채 구두닦이에 나선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지난달 29일 과테말라시티에서 만난 5살 소년 에스테반 알렉시스 레예스 레무스. 식구는 많은데 가족의 돈벌이는 시원치 않은 전형적인 빈민가 아이다. 에스테반의 식구는 할머니와 어머니, 삼촌, 여동생 등 5명. 하지만 돈을 벌어오는 사람은 어머니가 유일하다 보니 교육을 받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종일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가 한 달에 버는 돈은 800께찰(Quetzalㆍ약 12만5,000원)에 불과하다. 물가가 비싼 탓에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하다.
삼촌은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반신불수 상태다. 대수술을 5번이나 받았지만, 집 밖 거동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몸이 불편하다. 할머니도 70살 고령이다 보니 사실상 경제 활동을 포기하고 집 안에만 머물고 있다.
물론 에스테반에게도 아버지가 있다. 과테말라에서는 돈 벌이가 안 된다며 에스테반이 태어나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에스테반의 할머니는 "아비가 사실상 가족을 버린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테반 가족은 과테말라시티에서 동쪽으로 5시간 떨어진 싼타로사 농촌지역에서 살다가 7년 전 이곳으로 옮겨왔다. 농사를 지어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 그나마 일자리가 있는 인구 250만명의 대도시를 새 터전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당장 돈이 없으니 과테말라시티 외곽 로마블랑카 지역에 정착할 수 밖에 없었다.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35㎞ 떨어진 지역으로 9만여 주민의 대다수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빈민촌이다.
자동차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가봤다. 집은 대부분 벽돌이 아닌 양철로 만들어져 금방 주저앉을 것처럼 허술했다. 그나마 중심 도로는 콘크리트 포장이 돼 있지만,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흙길 투성이였다. 쓰레기 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고, 집안에서 흘러나온 오ㆍ폐수가 엉겨 붙어 악취가 진동했다.
에스테반은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 5살이 되도록 사실상 방치됐다.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이 자신을 돌봐줄 여력이 없다 보니 매일 거리로 뛰쳐나와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 동네 형들과 어울렸다. 자신도 모르게 나쁜 습관이 몸에 배었다. 동심은 사라지고 폭력성과 반항심만 늘어났다. 욕은 기본이고 툭 하면 아이들과 싸웠다.
그는 늘 유치원생을 부러워했다. 자신도 다른 아이들처럼 그림과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사립유치원의 한 달 수업료는 300께찰(약 4만7,000원)이나 됐다. 그가 한달 동안 열심히 구두를 닦아야 만질 수 있는 큰 돈이다. 안타깝게도 로마블랑카 지역에는 공립 유치원이 한 곳도 없다.
이 때 에스테반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민 곳이 바로 국제구호단체인 '굿네이버스'다. 한달 수업료가 25께찰(약 3,700원)에 불과한 '어린이 희망센터'라는 이름의 유치원을 이 지역에 개설한 것이다. 에스테반은 할머니를 졸라 지난해 9월 어린이 희망센터에 신청서를 접수했고, 가정형편 등 조건이 충족돼 지난해 10월부터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유치원에는 3~6세의 도시 빈민아동 100명이 다니고 있다.
박성락 굿네이버스 과테말라 지부장은 "대다수 가난한 부모들이 자녀 교육보다는 당장 필요한 돈벌이에 우선 순위를 둔다"며 "유치원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부모들이 자녀들을 초ㆍ중ㆍ고교에 진학시킬 확률이 높아진다"고 유치원 건립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 에스테반의 경우 입학 초기만해도 소리를 지르며 반 친구들과 많이 싸웠는데, 이제는 축구도 같이 하며 잘 어울리고 있다. 또 스페인어를 배워 자기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 요즘은 그렇게 원하던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산다. 틈만 나면 흰색 도화지에 색연필로 사람과 새를 마음껏 그린다.
에스테반의 할머니는 폭력적이었던 손자가 동심의 순수한 다섯 살 소년으로 돌아온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과거에는 종일 밖에서 겉돌고 말도 잘 안 듣고 투덜거리기만 했어요. 요즘은 집에서 동생과 함께 책도 읽고 자주 웃는 편이에요.
정말 이 아이가 과거의 거칠었던 내 손자였는지 의심이 들 정도라니까요." 할머니는 요즘 더 살아야 할 삶의 목표가 하나 생겼다. "3살 된 손녀도 같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데,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정규 교육을 가르치고 싶어요."
●국내외 빈곤층 지원 굿네이버스
굿네이버스는 1991년 설립된 토종 국제구호단체다. '좋은 이웃'(Good Neighbors)이라는 뜻으로 굶주림 없는 세상, 투명한 사회,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뛰고 있다.
28명이 모여 출발했지만, 지금은 정기후원자 16만명의 도움으로 국내 35개 지부와 북한 및 해외에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외에서는 91년 방글라데시 구호 사업 지원을 시작으로 케냐, 에티오피아, 르완다, 네팔,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 24개국에서 활동 중이다.
이일하 회장은 "아동교육을 비롯해 질병예방, 위생환경 개선 등 보건의료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며 "특히 직업교육 등 지역개발 사업을 통해 빈곤과 재난 등으로 고통 받는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해외 사업이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아 96년 국내 최초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NGO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 협의지위'를 부여 받았다. 2007년에는 유엔의 빈곤퇴치 운동인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관련한 사업 성과를 인정 받아 새천년개발목표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중남미 국가로 구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첫 진출 지역은 과테말라. 이 곳에서는 대표적 빈민촌인 로마블랑카 지역을 중심으로 초등학교에 책 등 교육기자재를 지원하고, 지역보건소와 '어린이 희망센터'(유치원)를 건립해 운영 중이다.
국내 구호활동도 활발하다. 전국 35개 지부, 106개 사업장에서 결식아동, 아동복지시설 지원사업과 아동학대 예방 및 상담사업, 지역복지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방학 기간에도 '희망나눔학교'를 열어 결식아동에게 급식 및 학습 지원, 심리 치료, 가정 상담 등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93년부터는 아동을 대상으로 세계시민교육을 실시해 나눔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북한에도 95년부터 인도적 차원에서 육아원 9곳과 의료사업장 5곳을 비롯해 젖소목장, 닭 목장 등 27개 사업장을 지원하고 있다.
지진 홍수 태풍 등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세계 이웃을 돕기 위한 긴급구호 활동도 굿네이버스의 활동 중 하나. 93년 소말리아 난민 구호를 시작으로 94년 국내 최초로 르완다 긴급구호 활동을 펼쳤고, 지난해 중국 쓰촨(四川)성 지진 때도 긴급구호사업을 벌였다.
굿네이버스는 구호 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이달 1일부터 국내 최초로 기부안내 사이트인 '기부 스타트'(www.givestart.org)를 개설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화(02-6717-4000) 또는 홈페이지(www.goodneighbors.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과테말라시티= 글·사진 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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