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본 한국 경제는 미국보다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선진국 경기가 살아나기 전까지는 L자형 침체가 계속될 것으로 봅니다."
세계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에서 고국을 지켜본 노교수의 진단은 냉정했다. 미국 금융학계 원로 박윤식(69)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금융학)는 22일 "금융시장이 잠시 반짝할 수는 있어도 우리 경제의 근본적 취약성은 여전하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최근 학기를 마치고 방한한 그를 숙소인 서울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글로벌 금융시장이 진정세를 보이는 듯 합니다. 세계 경제도 살아나는 건가요.
"적어도 금융은 정상을 회복했다고 봅니다. 시장 안정도를 대표적으로 반영하는 3개월 만기 리보금리(런던 은행간 금리)가 작년 리먼 사태 전후 2.25%에서 순식간에 5%대로 뛰었는데 최근 1% 아래까지 떨어졌습니다. 실물 경기도 이제는 저점에 아주 가까이 왔다고 봅니다. 올 하반기에는 더 이상의 추락은 없을 듯 합니다."
-한국의 주가와 환율에는 최근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집니다. 한국도 바닥에 온 겁니까.
"밖에서 지켜 본 한국 경제는 미국보다 더 힘들다고 봅니다. 회복의 동력인 내수 비중이 미국보다 훨씬 작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출이 관건인데 미국 같은 선진국이 회복돼야 한국도 회복될 것이고 그 속도도 미국보다 훨씬 느릴 겁니다.
미국이 U자형 회복이라면 한국은 L자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요즘 주가는 반짝 오르는 듯 하지만 한국 경제는 근본적 취약성도 여전합니다. 준법정신 회복과 불필요한 규제 개혁이 시급합니다."
-그동안 당국의 과감한 유동성 공급 필요성을 역설하셨는데요. 요즘 상황 같으면 더 안 풀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요즘도 지방에선 유명 건설사의 아파트도 미분양이 나옵니다. 거시적인 유동성은 많이 풀렸다지만 기업들에겐 여전히 '돈맥경화'가 심한 상태입니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은 이번 위기대응 과정에서 중앙은행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금리인하에 그치지 않고 기업어음, 모기지담보증권(MBS), 장기국채 등을 적극 사줬습니다. 돈이 돌지 않으니 필요한 곳을 찍어 뿌려준 셈입니다. 우리 정부나 한국은행도 20세기식 거시 대응만 고집하지 말고 선진국들의 미시 정책을 본받아야 합니다. 막힌 곳을 풀어주는 유동성 공급은 여전히 절실하다고 봅니다."
-무조건 푼다고 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벌써 일각에서는 위기 후 버블을 우려하고 유동성 환수 같은 탈출전략 얘길 하는데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요즘 탈출전략을 언급하는데 이는 다분히 정치적 수사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더 풀어야 하는데 늘 염려는 하고 있으니 발목은 잡지 말라는 의미죠. 물론 FRB도 언젠가 흡수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 살리기가 우선인 상황입니다. 경기하강이 속도를 줄였을 뿐, 여전히 진행중이니까요. 한국의 탈출전략은 전반적 유동성보다는 부동산 같은 특정분야 중심으로 짜야 한다고 봅니다."
-한은법 개정이나 금융위ㆍ금감원 통합 등 금융감독 체계 개편이 기관간 다툼으로 변질되는 느낌인데요.
"감독체계 개편은 미국에서도 큰 이슈입니다. 세계적으로도 감독체계는 크게 달라질 겁니다. 국가적 중대사인 만큼 청와대에서 나서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옥상옥(屋上屋) 구조인 금융위ㆍ금감원은 통합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로 나뉜 국제ㆍ국내금융 관할도 인위적인 느낌입니다.
한은에 거시 감독권을 주는 건 필요하지만 지금처럼 한은이 소극적 역할에 머문다면 달라고 할 자격이 의심됩니다.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입니다."
-거대 투자은행(IB)들이 무너지면서 안 그래도 IB에 서툴렀던 국내 금융사들은 갈 길을 잃은 듯 보입니다. 대안이 있을까요.
"1933년 대공황 때 탄생한 미국의 IB 개념은 작년에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월스트리트식 IB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새 금융 패턴으로 나가야 합니다. 현재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이런 재편작업이 진행중이니 이를 잘 참고해 방향을 설정해야 할 겁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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