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이 디~ (안녕)
소녀여, 오늘도 강변에는 그날처럼 은빛 음악이 흐르고 있겠지요. 라오스 북부의 작은 도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봄날의 며칠을 빌려 그곳에서 호사를 누린 시간을 생각하면 소년처럼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메콩 강에서 눈 인사를 나눴던 소녀 뱃사공, 그대. 올해 열일곱 살이라고 했나요. 이름은 그때 묻지 못했으니 지금도 알지 못하네요. 그냥 루앙프라방이라고 불러 볼게요. 그곳은 해맑은 미소, 바로 당신이었으니까요.
■ 루앙프라방- 당신은 무욕의 땅이었습니다.
루앙프라방 공항. 나지막이 앉아 있는 모습에 시골 간이역인 줄 알았어요. 작은 검색대만 숨겨 놓았다면 말이죠. 지붕이 한국의 잘생긴 기와집을 닮아서 더 반가웠답니다.
승합차에 몸을 싣고 30분을 굴러 발 들여 놓은 도심. 마을은 메콩 강과 칸 강을 양 손으로 한 키다리 아저씨처럼 누워 있더군요. 꼬물꼬물 손 내미는 열대나무 '덕잠빠', 올망졸망 잇닿은 골목들, 자잘자잘한 아이들의 황톳빛 웃음까지 욕심 없는 풍경이 그득했어요.
거리에는 '툭툭'이라는 오토바이 사촌 같은 녀석들이 털털대며 달리고 있더군요. 아무튼 관광지의 번쩍거림은 한 움큼도 주울 수가 없었답니다. 시속 3km의 느림이 넘실대는 이곳의 미학은 유네스코도 반했나 보죠. 1995년에 이미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점찍었으니 말이죠.
서구식 건축물도 꽤 많더군요. 빛 바랜 간판을 내건 카페, 갤러리…. 주민들에겐 아픈 기억이겠지만 100여년 전 프랑스, 일본 등 바깥 나라들에 짓눌린 고난의 시기가 있었지요. 그 아린 흔적마저 넉넉한 전통문화 안에서 용서되고 있는 듯해서 불편하진 않았답니다.
■ 루앙프라방- 당신은 황금의 땅이었습니다.
오랜 옛날 소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시절은 굉장했다죠. 라오스의 중세를 도맡아 이끈 도시였으니까요. 란상 왕국이 16세기에 도읍을 비엔티안으로 옮기기 전까지는요.
맘 먹고 관광을 시작하기에 좋을 듯하여 중심 거리인 시사방봉에 있는 루앙프라방 박물관부터 찾았어요. 마지막 왕인 시사방바타나 일가가 지냈던 궁이죠. 공산화라는 낯선 시간을 만나며 왕족은 어디론가 ?겨나고 1975년 지금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여느 곳과 달리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입장해야 했죠. 당대 명품들이 그날처럼 숨쉬고 있었지만 왕 접견실에 그려진 벽화가 보여 주는 민초들의 애틋한 일상이 더 좋았어요. 외국에서 왕실로 보내 온 선물도 한 방 가득 전시되고 있더군요.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 모형, 중국과 일본의 자기 세트….
그러나 '코리아'라는 표식은 찾을 수 없어 아쉬웠죠. 나라의 보물 1호 격인 황금 불상 '프라방' 앞에선 두 손 모으고 인사도 했죠. 루앙프라방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이 위대한 불상에서 연유했다면서요.
불심의 여운을 따라 이웃해 있는 사원으로 발걸음을 향했답니다. 다투어 내미는 황금빛의 유혹. 색유리와 금으로 한껏 장식된 와트 시엥 통 사원은 눈이 시리도록 화려했어요. 지붕 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내려온 본당의 모습도 정겨웠답니다.
내친 걸음에 허덕허덕 328개 계단을 밟으며 푸시 산에 올랐어요. 가쁜 숨은 타트 촘 푸시 사원의 황금 첨탑 앞에서 탄성으로 멎었답니다. 층층이 쌓인 시간의 더께도 그 찬란함을 감추지 못했더군요.
■ 루앙프라방- 당신은 나눔의 땅이었습니다.
아침 6시 시사방봉 거리. 주황빛 장삼의 행렬은 밤새 흩뿌린 꽃비 덕분인지 유난히 진했어요. 어림잡아 200명이 넘는 구도자들의 탁발이 시작되더군요.
몸 낮춘 주민들의 찰밥 공양 위로 앳된 승려들의 둥그런 바리때가 지나고. 이내 그 차고 넘침은 눈 비비고 나온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더군요. 성(聖)과 속(俗)이 하나 되는, 나뉨이 아닌 나눔. 거룩한 휴머니즘의 현장이었어요.
이른 저녁 시간엔 시내를 수놓은 야시장의 불빛을 따라 나섰지요. 고산지대 주민들의 봇짐들이 하나 둘씩 좌판으로 풀어지고…. 색색의 스카프, 토실한 인형, 실을 꼬아 만든 팔찌….
거친 피륙을 끌어안고 몇날며칠 밤새워 만든 것들이겠지요. 오십 줄 가까워 보이는 인상 좋은 원주민은 반값에 셈을 해 준다며 여행자의 쇼핑백을 두둑하게 채워주더군요.
장이 파하면 다시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그들의 어깨가 많이 가뿟해졌으면 좋으련만. 이웃한 길거리에선 '랍'과 '삥'이라는 토속 먹거리들을 끓이고 굽고 그 옆엔 망고와 두리안까지 잔칫날처럼 넘쳐났답니다.
"날이 더울 때는 음식을 먹고, 내키면 언제든지 춤을 추어라." 이런 라오스 속담이 있다면서요. 줄지은 백열등 불빛이 손짓하는 칸 강변. 노천 주점을 찾았지요. 국민맥주 '비어 라오'가 구수하게 맞아 주더군요. 슬로 템포에 어울리는 사람들의 춤사위도 흥겹게 지켜볼 수 있었고요. 발그레한 들썩임이 여정의 언저리를 넉넉하게 채워주었답니다.
라오스. 가난하지만 따스한 미소를 가진 사람들. 욕심 없는 나눔이 다시 그리워지네요. 소녀여, 그대의 미소는 오늘도 메콩 강변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겠지요.
■ 여행수첩/ 라오스 루앙프라방
● 라오스는 한국보다 2시간이 늦다. 비자는 필요 없고 15일간 머물 수 있다.
● 라오스 공식 화폐는 킵(kip, 1달러=약 8,400킵)이다. 태국의 바트화나 미국 달러도 통용된다. 날씨는 열대성 몬순기후다. 평균기온 25.7도.
● 루앙프라방에서 한국 음식을 구경하긴 쉽지 않다. 메콩 강변 오운캄로드에 한인이 운영하는 '빅트리'라는 카페가 있다. 양식이 주 메뉴이지만 김치찌개와 라면도 맛볼 수 있다.
● 시내가 작고 평지여서 자전거 타기에 좋다. 시사방봉 거리 주변의 게스트하우스나 상점에서 빌릴 수 있다. 숙소에 일렉트릭 자전거가 준비된 곳도 있다.
● 베트남항공이 오전 10시35분, 오후 7시30분 인천공항에서 매일 출발한다. 베트남 하노이를 거쳐 라오스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왕복 항공권 가격은 약 48만원이다. (02)757-8920 www.vietnamairlines.co.kr
루앙프라방(라오스)=지관식기자 ks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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