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의 조기 극복을 경제 분야 최대 업적으로 꼽아왔다. 불과 1년 만에 사상 유례없는 경기 급락세에서 벗어났다는 점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 정부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시중에 공급했고, 특히 IT벤처 분야에 뭉칫돈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유동성의 상당 부분은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투기를 부추겼고, 우리 산업 기반의 구조적 개선으로 연결되지 않은 채 IT 분야의 거품만 초래했다. 확장적 거시정책이 낳은 후유증이다.
요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외견상 각종 경기지표가 반등하고 금융시장 불안이 진정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경제가 바닥을 친 게 아니냐는 기대감이 확산되고 있다. 물론 정부와 중앙은행이 풀어놓은 유동성의 힘 때문이다. 문제는 시중에 풀린 막대한 돈이 주식과 부동산, 단기 금융상품으로만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돈이 실물 부문으로 유입되려면 한계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해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다행히 정부는 지금이야말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우리 경제에 있어 기업 구조조정 노력은 향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봐야 한다." "부실 대기업의 경우 계열사를 매각해서라도 정상화하겠다." 최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진동수 금융위원장의 발언에서도 강한 의지가 읽혀진다.
이에 따라 이번 주에는 채권 금융기관 주도의 기업 구조조정 작업이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채권 금융기관은 5월 말까지 10여개 대기업 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는 한편, 금융권 신용공여액 500억원 이상인 430개 개별기업을 대상으로 신용위험평가 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재무구조개선 약정 대상 기업의 명단은 빠르면 이번 주 초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처럼 유동성이 풍부한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제대로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 돈이 풍부하면 금리가 떨어지기 마련이고, 부실 기업의 연명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구조조정은 고용시장에 악재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양산되면 경기 회복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재계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 방침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점도 변수다. 하지만 확장적 거시정책이 위기 극복 이후 버블경제를 초래하는 등 불안 요인으로 돌아온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당장 경기를 띄우겠다는 조급증을 버려야 한다. 지금은 괴롭고 힘들지라도, 멀리 보면서 시장 체질을 강화하는 쪽으로 부실 대기업 구조조정에 전력 투구해야 할 때다.
고재학 경제부 차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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