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조직에나 대표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야 질서가 있고 조직이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명목상으로만 대표인 경우가 있다. 법적으로는 대표에게 힘이 부여되어 있으나 실제로 힘을 행사하는 인물은 제3자인 경우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조직이 많다. 대표적인 조직이 재벌이다.
재벌 닮아가는 정치권
기업의 법적 대표는 대표이사이다. 대표이사는 기업을 운영할 권한과 책임이 동시에 부여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은 대표이사가 허수아비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경영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오너로 불리는 그룹 총수이다. 총수는 모든 계열사의 최고 경영권을 행사한다.
법적으로는 각 계열사에 독립적인 대표이사가 있고 그들이 최고 경영권을 행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총수가 위임한 범위에서만 경영권을 행사하거나 시키는 일만 하는 고용 경영자에 불과하다. 반면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대표이사에게 돌아간다. 법적으로는 대표이사가 최고 경영자이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이 한창일 때는 오너가 권한은 행사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해서 오너들이 등기이사로 등록하도록 하는 제도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등기이사로 등록하면 법적으로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등록되지 않았어도 실세 경영자로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유권 해석을 만들기도 하였다.
매우 한국적인 특성이 아닐 수 없다. '명의 따로 실제 따로' 의 희극 때문이다. 이때 명의상 대표가 대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비애가 왜 없겠는가. 권한은 행사하지 못하면서 책임은 모두 떠맡아야 하니 더욱 그럴 것이다.
한때 정치권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강권 통치하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지도자가 공민권이 박탈되었거나 투쟁 전략상 후선에 앉아 있을 때 이들의 대리인이 법적대표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제적인 힘은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라는 사람에게 있었고 대표는 위임 받은 일이나 수행하였다. 그래도 법적으로 대표인데 왜 자기 나름의 생각이 없겠는가. 그러나 후견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자기 생각을 집행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도 자기 신세에 대한 비애가 왜 없었겠는가.
이런 현상이 현재 집권 여당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국민들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여당 대표가 재보궐 선거에서 전패한 후 당을 혁신한다는 구실로 제시했던 개혁안이 단칼에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실세 대표였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대표 뒤에 실세 어른들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실제로 당을 지배하고 관리할 능력이 있어서 당대표가 되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지금 여당은 국민이 볼 때 참 이상한 점이 많다.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시켰으면서도 그 보다 더 중요한 당대표를 맡기지 않나, 공천에서 탈락시켰던 사람을 원내대표로 추천하려고 하지를 않나, 국민이 볼 때는 참 헷갈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정치 싸움을 한다고 해도 상식에는 맞아야지. 그렇게 뽑힌 대표가 과연 대표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까. 거기다가 국회의원도 아닌데.
원칙 따라야 부작용 적어
지금은 독재 시대도 아닌 데 얼굴 마담이 나설 이유도 없다. 그리고 자기가 대표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자신이 없다면 왜 구태여 대표를 맡아야 하는 것일까. 명색이 여당 대표인데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보니 딱하기도 하고 나라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모든 일은 원칙을 따를 때 가장 부작용이 적은 법이다. 대표이면 대표로서의 위상과 힘이 실려야 한다. 그것도 집권 여당의 대표인데. 집권 여당이 편법으로 운영되는 재벌식 지배구조를 따라서야 되겠는가. 그래도 재벌기업의 대표이사는 자기 아래는 확실히 장악한다. 그래서 재벌조직은 정치조직 보다는 더 잘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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