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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9> 어머니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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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9> 어머니를 만나다

입력
2009.05.18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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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촬영현장으로 돌아왔다. 2006년 10월 24일 밤, 나는 70여명의 스텝을 이끌고 전라도 광주를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흐르는 시골의 야경을 보는 내 가슴은 함을 진 새신랑처럼 쿵쿵 뛰고 있었다. 16년만의 일이다. <김부남 사건> , <시인> , <명성황후> 가 엎어지며 만신창이가 된 내가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2004년 5월이었다. 신문에서 가정의 달 특집으로 꾸민듯한 신간 소개 코너를 훑어보다가 문득 한 곳에 시선이 꽂혔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 최인호 씨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모아 놓은 책이었다. 흥미로운 제목이었다.

곧장 서점으로 달려갔다. 나는 청년시절부터 최인호 씨의 작품을 좋아했다. 글재주는 여전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웃다, 울다 눈두덩이 단번에 벌겋게 부어오르고 말았다. 불현듯 할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나를 키우며 한평생을 홀로 살다가 가신 할머니. 그분이 나의 어머니였다. 나는 즉각 최인호 씨에게 전화를 걸어 영화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인호 씨와 인연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의 소설 <별들의 고향> , <바보들의 행진> , <몽유도원도> , <유령의 집> 이 우리가족에 의해 영화로 기획되고 제작되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몇몇 지인들이 나의 복귀를 위해 앞장서고 나섰다. 그러나 곧 파행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작가로 선정한 노희경 씨가 힘들게 살다 가신 어머니 생각을 이길 수 없다며 집필에 난색을 표했다. 마땅한 작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직접 쓰기로 하였다. 30고까지 썼다.

투자 역시 쉽지 않았다. 상업성 논리로 무장한 기관투자사는 '예술영화'라며 난색을 표시했고, '정연한 사회주의자'가 장악하고 있던 영화진흥위원회 역시 '예술 영화지원'을 외면하였다.

배우들도 변해 있었다. 어머니 역에 이미숙, 아들 최인호 역에 안성기를 섭외하였는데 모두 노역이라며 "노"(NO)를 외쳤다. 최인호 씨가 곁에서 보고 있다가 말리고 나섰다. 가족들도 고개를 저었다. 상업성이 높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택하고, 이번 기획은 접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소신은 변함이 없었다. '영화쟁이'로서 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영화'로 만들어 바치고 싶었다. 자본논리와 부조리한 사회적 여건 때문에 만들고 싶은 영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한 평생 나를 위해 살다 가신 할머니에게 감사와 사랑의 표현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내 의무일 수도 있었다. 나는 영화작가다. 결단을 내렸다. 어떤 재정적 손실이 있더라도 내 생애에 가장 감사한 나의 할머니에게 '영원히 사랑한다'는 마음을 영화로 전해야 한다.

식구들을 총집합시켰다. 아내에게는 없는 재산이지만 다 털어 내놓으라고 하였다. 직장에 다니는 큰 아들 상원에게 휴직계를 내게 하고 젊은 최인호역을 맡겼다. 작은 아들 준원에겐 감독준비를 중단하게 하고 프로듀서를 맡겼다. 어머니역은 <꿈나무> 에서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한혜숙 씨에게, 노역 최인호역은 내가 맡기로 하였다.

촬영개시는 어린 최인호가 엄마 몰래 서커스를 훔쳐보는 장면으로 하기로 하였다. '동춘 서커스단'이 광주 충정로거리 복판에서 천막을 치고 공연을 하고 있었다. 박세훈 단장은 과거 부산극장 광고부장 시절, 내가 무대인사 차 내려왔을 때 만난 적이 있다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날, 촬영 현장에 선 내 가슴은 감동 때문인지 쿵쿵 울리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속으로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감독생활을 못한 잃어버렸던 긴 세월에 통곡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1990년 3월, <혼자 도는 바람개비> 강원도 남애 촬영현장 이후, 무려 16년 만에 외치는 "레디 카메라, 액션".

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복귀를 막았던 그 숱한 장벽을 뚫고 나는 돌아오고 말았다.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무려 150컷을 찍었다. 소설을 읽은 지 2년 반. 전국 촬영지 답사 500일, 세트제작 90일. 준비는 완전무결하였다. 서울 도시개발공사의 지원을 받아 은평구 뉴타운지역으로 지정된 구파발 일대를 영화의 주 무대인 1960년대의 서울주택가로 정하였다.

촬영 45회, 필름 5만 피트, 예정된 스케줄을 100% 소화하였다. 20, 30대로 구성된 스텝들이 겨울 강행군으로 쓰러졌다. 5, 6명이 들것에 실려 나갔다.

사람들은 내가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며 수군거렸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하 하, 이렇게 좋은데 왜 쓰러져..." 그런데 그들의 말이 맞았다. 드디어 내가 쓰러지고 말았다. 촬영, 편집, 녹음, 색보정, 현상을 마치고 자막실에서 였다.

영어 자막 작업을 마친 후 스텝들과 인사를 하며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내가 온몸을 쓰지도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었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고 내려왔다.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급히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강남 세브란스병원 응급실. 척추병원장 조용은 원장의 집도가 신속히 이루어졌다. MRI 결과가 나왔다.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식구들이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척추에 종양의 징후가 보인다는 소리에 아내가 사색이 되어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괜찮아' 하며 아내의 손을 잡고 웃었다. "고마워." 그러나 하늘이 나와 우리 가족을 예뻐 하셨는지 4번과 5번 척추사이의 디스크가 터져 수술하면 회복될 수 있다는 의사의 최종 판단이 나왔다. 의사는 8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나와서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힘든 수술은 처음이에요." 너무도 오래 전에 디스크가 터져 피가 척추 전체를 덮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통증으로 거동이 불가능한데 도대체 어떻게 활동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아플 정신도 없었어요." 그렇다. 나는 내 몸이 부서지는지도 모르고 일했다. 얼마나 사랑하는 일인데. 더욱이 내가 이 세상에서, 아니 저 세상에 가서도 내가 제일 감사하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를 대신한, 나의 할머니에게 바치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만일 신이 내 생애에 가장 기뻤던 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답할 것이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를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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