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움베르토 에코 선생을 만났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코, 단단한 턱, 안경 너머에서 번뜩이는 이지적인 눈매가 책 날개 사진에서 봤던 그대로다. 꿈이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이라면 나는 선생을 부러워했음에 틀림없다. 단단한 복근도 수려한 용모도 없이 오로지 지성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이탈리아 여성의 선망을 받고 있다는 글을 본 이후부터다. 물론 선생만큼의 지성을 쌓는 것이 아놀드 슈워츠네거의 몸을 만드는 것보다는 수백 배 어려운 일일 테지만 말이다.
"미디어가 곧 정치"
내가 물었다. "사람들은 왜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나요?" "배우들에겐 당연하지" "아니요. 제 주변의 수많은 중년의 가장들이 제게 영화 출연을 부탁합니다. 왜 그럴까요?" "음... 정신분석학적으로 얘기해주랴? 아님 기호학적으로?" "어느 쪽이든지요" "그럼 정신분석학적으로 먼저. 일단 그들은 중년에 이르러 눈에 띄게 줄어드는 성적 능력에 당황해서 뭔가 자신의 육체가 지배할 수 있는 대리 공간을 찾는 거란다."
이해력이 느린 내가 다시 물었다. "추억이나 자기 홍보를 위해서가 아니고요?" "그건 표면적인 자기 기만적 욕망이고 실제 욕망은 현실에서 실추되어가는 권위를 가상의 세계에서라도 회복하려는, 그래서 스크린 위에서 육체적으로 타자화된 자신을 보면서 성적인 좌절감을 잊으려는 몸부림이란다" 무지몽매한 중생을 만난 선생은 지적인 책임감이 발동했는지 이제 질문 없이도 답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이 그런 욕망을 가질수록 영화감독들이 권력을 가질 수도 있다. 문화 권력은 사람들의 욕망의 생성과 발산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맥루한 식으로 미디어가 곧 권력이 되는 거지. 현재 방송을 놓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그 예가 되지 않겠니? 정치가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미디어가 곧 정치가 되는 거란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국회와 방송국을 여의도라는 작은 섬 안에 격리 수용한 것 아니냐? 미디어의 권력은 곧 인터넷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무정부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어, 제도화된 정치권력과 늘 긴장 관계에 있을 것이다. 이십년도 더 전에 존 레논이 '나라도 없고 종교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외치면서 상상했던 세상이 지금 보니 바로 인터넷이었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존 레논의 통찰이 위대하게 느껴지는구나"
선생답지 않게 지나치게 비약하는 것 같아 내가 끼어 들었다. " 영화 감독이 문화 권력이라구요?" "내 얘기를 잘 못 알아듣는구나. 언제나 문화가 현실적 정치권력에 봉사하는 역할을 했지만 미디어의 발달은 이 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가 문화에 봉사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얘기이고, 인터넷의 발달은 이 현상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똥파리의 양익준도 권력인가요?" "아! 영화 속에서 진짜 양아치처럼 나오던 그 사람! 그는 지금은 일단 진정성 있는 예술가야. 아직 제도화, 권력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물게 날 것의 진정성을 영화에 불어넣어 탁월한 성과를 획득했다. 하지만 그도 이번에 거둔 성공만큼 다음 작품에서는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권력과 진정성은 한 감독의 세계 안에서 하나가 늘어난 만큼 하나가 줄어드는 제로섬의 양극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결국 한 감독이 일생 동안 만들 수 있는 영화의 수준은 항상 똑같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니?"
"권력과 진정성은 제로섬"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요?" " 지성은 허무한 거란다" "그럼 저는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될까요?" "니 생긴대로 만들겠지" "제가 어떻게 생겼나요?" "복근도 없고, 수려한 외모도 없고, 지성은 쥐뿔도 없지" "허걱!" 역시 꿈은 논리도 없고 잔인하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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