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 왔다
씨앗들이 내 몸으로 흐르는
물길을 알았는지 떨어지지 않는다
씨앗들이 물이 순환되는 곳에서 풍기는
흙내를 맡으며 발아되는지
잉태의 기억도 생산의 기억도 없는
내 몸이 낯설다
언젠가 내게도
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 뿌리에서 꽃을 보려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는 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내 고통은 그곳에서
샘물처럼 올라온다
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 조은 시인은 그리 말이 많은 시인이 아니다. 때로 그의 시문법은 어눌하다. 또박또박 끊어지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다. 조용조용 그녀는 말하지만 정작 그녀의 시들은 외로움의 첨예 전선에 다가가 있다. 어느 곳에 앉았다가 우연히 몸에 묻어온 씨앗을 보고 적은 이 시 안에 내장된 가장 깊은 전언은 '다시는 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내 고통'이다.
'뿌리내리고 싶은 곳'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고통.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와 잎, 그리고 피어나는 꽃을 한 번도 누리지 못한 고통. 하지만 지금, 그 마음조차 가질 수 없는 고통. 그런데, 보라,
아직 몸만은 물기를 지니고 있다. 마른 줄 알았는데 씨앗이 묻어올 만큼 몸은 물기를 간직하고 있다. 고통이 샘물이 되어 씨앗들을 붙게 한다. 삶은 아직도 진행 중, 고통도 아직 진행 중, 생산은 영원히 진행 중.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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