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탁, 타타탁. 찰칵 찰칵."
9일 오후 2시30분,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스타크래프트 본선 4라운드가 펼쳐진 서울 문래동 '룩스 MBC 게임 히어로 센터' 3층 경기장 뒷편에 마련된 선수 대기실. 짧은 머리 모양에 검은 색 유니폼을 입은 한 선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쉴새 없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눌러댔다.
공군의 프로 게임단 '에이스' 소속의 박정석(27) 선수다.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출범 7년 만에 정규시즌 '100승 달성'(4월 21일)이라는 금자탑을 세운 그에게 정상에 오르게 된 비결을 묻자, "끊임없는 '혁신'의 결과였던 것 같다"는 단순한 답변이 돌아왔다.
누구나 '혁신'을 얘기하고 바라지만, 사실 기존의 익숙한 패턴을 버리고 선뜻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프로게이머로는 '노장 선수'축에 속하는 그에겐 더더욱 그랬다.
"제 자신을 버린다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그 동안 고수해왔던 저만의 경기 스타일을 포기한다는 자체가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 되니까요. 그런 제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결국 밑바닥까지도 떨어져봤습니다." 군인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간 그는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비록 정상의 자리에 올라섰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프로선수 입문 초창기 시절, 그는 힘과 패기로 상대를 제압하며 거침없는 질주를 이어갔다. 2004년 팀 이적(한빛스타즈→KTF 매직엔스) 이후에도 연승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깜빡이가 고장 난 불도저는 사고를 부르는 법. 주변을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그에게 호된 시련이 찾아왔다. 그의 전략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새로운 전술로 무장한 젊은 선수들에게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실패를 모른 채 상승가도를 달려온 그에겐 큰 충격이었다. 2006년 11월 이후 무려 13연패를 당했다. 상대를 압도하던 경기력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이제 한 물 간 선수가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현실에 안주해 변하는 시대 흐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나태함이 빚어낸 결과였다. 초창기 때 스타크래프트의 '황재'로 불리는 임요환(SKT T1)이나 '천재'로 일컬어지는 이윤열(위메이드 폭스) 선수 등과 부딪친 적이 드물었던 것도 그의 자만심을 부추긴 원인이었다.
"솔직히 '은퇴'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서 맴돌더군요. '이대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게임에 대한 열정 하나로 무작정 상경했던 그의 인생에 최대 위기였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계의 '지존'이 되겠다는 그의 열망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 놓았다. 나태해진 정신력에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자체 진단은 군입대(2008년 9월)라는 터닝포인트를 찾아냈다. 군입대를 계기로 경쟁 선수들에 대한 분석과 새 트렌드 연구에 열중한 결과, 전체 게임을 바라보는 시야가 크게 넓어졌다.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맞춤형 전략을 세우는 노련함도 생겨났다.
이런 노력은 그에게 '황제' 임요환도, '천재' 이윤열도 밟아보지 못했던 '100승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안겼다. 그는 100승의 위업을 달성한 다음 날, 라이벌인 이윤열 선수마저 꺾으며 진정한 강자의 탄생을 알렸다.
"이승엽 선수가 '아시아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하고, 그 이듬해 바로 타격폼을 바꿔서 논란이 됐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그 이유를 정확히 몰랐는데,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요. 변화와 혁신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의 키보드와 마우스를 챙겨 경기장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선 강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글ㆍ사진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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