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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59> 떨어진 공화당의 큰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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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59> 떨어진 공화당의 큰 별

입력
2009.05.1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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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이른바 `베이비 붐' (Baby Boom) 세대 출신의 첫 미국 대통령이었다. 재선에 성공해 8년의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날 당시 그에 대한 지지도는 66%로 2차 대전 이후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였다. 클린턴은 민주당 출신으로는 루즈벨트 이후 처음으로 8년을 재임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하지만 클린턴이 대통령 재선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는 성 추문으로 위신이 만신창이가 됐을 때였다. 모니카 르윈스키 (당시 22세) 라는 백악관 인턴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알려졌을 뿐 아니라 여기 저기서 여자들이 서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당했다고 나섰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만도 폴라 존스, 캐서린 와일리 등 약 10명은 되는 듯 했다. 그 중에도 엘리자베스 그레이슨이란 여성은 클린턴의 부인 힐러리 여사에게 클린턴과 성관계를 맺은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기까지 했다. 많은 여성들이 앞 다퉈 클린턴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밝혔는데도 힐러리 여사는 끝까지 남편 클린턴 곁에서 "나는 내 남편을 믿고 사랑한다"고 두둔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성을 들고 나온 공화당의 밥 돌 후보는 결국 현직 대통령인 클린턴의 젊음과 카리스마에 눌려 49% 대 41% 표차로 패했다. 마치 한국의 이인제 후보 때문에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낙선된 것 같이 그 당시 공화당의 밥 돌 측은 미국의 이인제인 로스 페로 후보 때문에 표를 민주당에 빼앗겨 선거에 패했다고 페로를 공격했고, 결국 페로의 정치생명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 무렵 공화당의 뜨는 별이었던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의 부인은 자기 남편과 의회 상임위원회 스텝으로 일하는 22살 난 칼리스타 바이셀의 관계를 알아냈다.

깅그리치 부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기자회견을 자청해 남편을 혹독하게 비난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공격을 퍼붓고는 법원에 이혼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힐러리 여사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이런 행동은 공화당의 영웅 깅그리치에게 정치적으로 깊은 상처를 주었다.

공화당에는 깅그리치에 버금가는 영웅이 있었으니 바로 최근 암으로 세상을 떠난 잭 캠프가 그 사람이다.

캠프는 원래 쿼터백으로 이름을 날린 풋볼 선수였다. 1964년에는 베리 골드워터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위해 활동했고, 1967년에는 로널드 레이건을 도와 그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1969년에는 레이건 주지사의 참모로 일했고,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의 보좌관 역할도 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 70년 공석이 생긴 뉴욕 버팔로의 지역구에 영입됐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잘 생긴 얼굴과 멋진 머리 스타일로 공화당의 존 케네디란 별명을 얻으면서 쉽게 미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캠프는 8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몇 달 못 가 부시에게 밀려 경선을 포기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선거자금 법 위반으로 12만 달러의 벌금을 내고 대통령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 부시 행정부에서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에 임명됐고, 밥 돌 상원의원이 대선 후보로 나섰을 때는 런닝 메이트로 출마했다.

도덕성을 주장하는 전쟁영웅 밥 돌, 그리고 공급주의 경제를 주장하는 미남 풋볼선수 출신 연방 하원의원 잭 캠프를 정ㆍ부통령 후보로 내세운 공화당은 두 사람을 이른바 `드림 팀' 이라고 만족해 하면서 클린턴과 앨 고어를 내세운 민주당에 압도적 승리를 거둘 것으로 자신했었다.

그리고는 클린턴의 도덕성을 집중 공격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클린턴 재임 4년 간 현저하게 나아진 경제 상황에 만족하면서 그의 여자 문제는 못 본 척 외면했다.

이런 민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공화당은 클린턴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에 바빠, 그가 제시한 제2의 경제 계획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데 소홀했었다. 더욱이 많은 국민의 시선을 끌었던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또 한번 패배했다.

민주당 앨 고어의 준비된 논리, 그리고 알기 쉽게 정돈된 민주당의 경제정책에 공화당 부통령 후보 잭 캠프는 무척 당황했고, 토론의 방향을 클린턴의 도덕성 문제로 돌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공화당은 앞으로 4년 간 뭘 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이 뚜렷하지 않았던 데다,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얼버무리기식 답변으로 끝을 맺는 잭 캠프에게 크게 실망했다.

토론회는 캠프의 얕은 지식과 앞뒤가 맞지 않는 답변으로 오히려 고어를 더욱 돋보이게 했을 뿐이다. 고어와 캠프 둘을 비교해 볼 때 고어의 남부 테네시 사투리가 섞인 능숙한 언변과 재치, 카리스마가 토론회를 통해 빛을 발했다.

게다가 잭 캠프의 쉰듯한 목소리와 앨 고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대조적이었다. 밥 돌이 클린턴과의 토론에 참패한 ?이어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잭 캠프마저 고어에 패하자, 공화당은 서둘러 선거전을 이슈 중심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나를 포함한 공화당 의원들은 텔레비전 앞을 떠나 각자의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실망이 너무 커서 창피한 마음까지 들었었다. 나는 지금도 96년 10월9일, 공화당 소속 동료의원들과 함께 의원 휴게실의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잭 캠프와 앨 고어의 토론을 가슴을 졸이며 지켜봤던 당시를 잊을 수가 없다.

공화당이 희망을 걸었던 밥 돌과 잭 캠프 티켓은 역시 민주당의 클린턴과 앨 고어 팀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공화당은 성 추문에 얼룩진 클린턴의 성공을 씁쓸히 바라보면서 다음 세대의 영웅을 찾기 시작했다. 그 당시 깅그리치와 캠프는 공화당의 영웅이었다.

나도 여러 번 캠프의 선거운동을 도왔지만, 공화당 안에서 캠프의 인기는 정말로 대단했다. 그의 찬란한 과거와 카리스마는 그에게 공화당의 존 케네디라는 별명을 가져다 주었다. 공화당은 2000년에 다시 잭 캠프의 대통령 출마를 간곡히 바랐지만 앨 고어에게 패배한 상처가 너무도 컸던지 그는 끝내 고사하고 부시 주니어를 추천했다.

2009년 5월 2일 그는 암과 투병하다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의 꿈도 부통령의 꿈도 접은 채 공화당의 별은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공화당은 혜성같이 나타난 민주당 소속의 새로운 젊은 영웅 버락 오바마에 대적할 새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뉴트 깅그리치나 잭 캠프 같은 영웅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바마는 4년 후에 재선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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