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극작가의 변신은 무죄인가. 그는 머리에 검은 물을 들이고 청년처럼 와서, 제안했다. "멋있는 얘기를 하고 싶다, 철학적이고 우주적인." 그는 여전히 유쾌하고 선명했다. 새벽 2시 30분까지 글 쓰다 나온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즐겁게, 성실히 답했다. 신작을 공연하고, 1974년에 발표한 희곡 '결혼'이 뮤지컬로도 상연된다니 신이 났던 것일까. 막 끝난 문화예술위원회 참여 경험 역시 그의 서사 자본일 것이다.
_ 과실치사로 17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남자의 속죄 행각(?)을 희극적으로 그린 신작 '죽기 살기'가 곧 공연된다.
"2년간 쓴 최근작이다. 이제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니다. 서울예대 극작과에 교수로 있으니 창작만 할 수 없다. 젊은 시절만큼 빨리 안 써지기도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쓰는 게 중요한 것 같다. 1971년 데뷔 후 해마다 한 편씩, 거의 40편은 썼다. 두 편 더 쓰면 여덟번째 희곡집을 채울 것이다. 권당 5~6편 실려 있으니, 유치진, 이근삼 선생과 비슷한 분량이다. 머리에 검은 물 들인 건 더 쓰겠다는 의도다.(웃음)
자식을 마흔 명쯤 낳으면 아버지로서의 애착이 없어진다. 잘 사는 놈이 많으면 좋을 뿐이다. 희곡집 10권까지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요즘은 꼭 그래야 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10년 더 살겠지만, 지금까지의 점수를 매기라면 한 70점이다. 70점짜리 인생이란 그리 불만족스럽지 않은 인생이다."
_ 이제는 학교까지 챙겨야 하는 몸인데.
"서울예대에는 2003년부터 재직하고 있다. 오태석, 윤대성이라는 두 거장에다 나까지 합쳐 '트로이카 시스템'이라고 화제였다. 오태석은 공연을 전제로 한 희곡 작가라는 점에서, 윤대성은 극작가를 길러낸 교육가라는 점에서, 나는 출판 텍스트 생산자로서의 희곡 작가라는 연극평론가 장성희씨의 평가에 동의한다. 문학적 소산으로서 희곡을 창작한다는 지적 같다."
_ 당신이 쓴 희곡 40여 편의 주제와 소재가 모두 다양하게 보인다.
"그래도 초기작들의 모티프가 변주된다. 그 사실은 '죽기 살기'에서도 확인된다. 좌절하는 영웅을 그린 초기작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셋'을 보자. 유랑곡예단으로 도시를 전전하면서 총 쏘는 묘기 보여주던 장님 아버지가 자신들을 사기꾼으로 몰아부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보여주겠다며 맞서다 아들이 정말 총 맞고 죽는다는 내용이다. 그처럼 좌절하는 영웅의 모티프는 이후 '내마' '봄날' '죽기 살기' 등에서도 변주된다."
_ 사실주의 계몽극에 경도됐던 1970~80년대에 당신은 우화극적 상상력과 반사실주의적 극작으로 한국 연극을 풍성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5살 때 이승규, 박인환, 김진태 등 쟁쟁한 배우들이 있던 극단 가교 입단으로 시작했다. 막 내리면 모든 게 소멸하는 연극의 운명은 나를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그게 가슴 아프고 견딜 수 없이 허무했는데, 소멸이 주는 깨끗함의 위안이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멸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게 삶이다. 연극하기를 잘했다고 생각되는 게, 막 내리고 소멸할 때 큰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모태 기독교 신앙인데, 영생에 대해 '절대 노(No)'라 하고 싶다."
_ 이번 작품 '죽기 살기'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소멸의 문제를 등한시하는 우리 시대에 대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은유와 우의가 유보적ㆍ중립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내 작품이 닫힌 구조라는 지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죽기 살기'는 우의성ㆍ단순성으로 밀어부친 셈이다."
_ 그렇게 본다면 '봄날'도 다층적 구조로 읽힐 수 있지 않는가.
"1984년 군사정권 시절을 배경으로 부자 사이의 갈등을 그렸는데, 우의적 정치극과 인간의 본능을 빗댄 가족사 사이에서 평이 분분했다. 그러나 군사정권기가 지나니 정치성이 희석돼 인간의 본능을 은유한 가족사로만 읽힌다. 지난해 공연(이성열 연출)될 때는 정치성이 완전히 희석됐다. 작가가 무엇을 썼느냐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는 것이다. 모든 작품은 시대의 산물이다. 작가의 확고한 주장도 가변적이다. 시간을 건너 뛰어 살아 남는 작품은 시대에 따라 새로 읽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불지른 남자'의 경우를 보자. YS정권 때 쓴 그 작품은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동자를 주인공으로 했다. 시간이 지나 민주화운동의 사회적 의미가 희석되고 모두가 이기주의자가 돼 좌절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대에 너무 '눌러 붙어' 이제는 공연 안 된다. 백상예술대상 희곡상을 받았고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작품으로 호평 받았으나 지금은 전혀 상연 안 된다. 희곡 작가들은 동시대에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시의에 민감해야 하면서도 생명력을 의식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경험한다."
_ 문학 쪽에만 논의가 치우치긴 하지만, 이제 우리도 노벨상 탈 때가 안 됐나.
"해롤드 핀터, 새뮤얼 베케트, 다리오 포 등이 희곡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은 희곡을 문학에서 제외하려는 경향이 있어, 신춘문예에서도 홀대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신춘문예에서 희곡 분야를 지속해 온 한국일보는 장하다. 독일문학 쪽을 보자. 괴테, 실러, 브레히트 등은 희곡 문학에 엄청나게 기댔다.
함세덕, 오영진, 차범석 등의 대가들을 보유하고도 유독 한국이 희곡에 홀대가 심한 것은 큰 손실이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내가 2년 동안 해왔던 희곡 활성화 프로그램도 최근 없어졌다. 그나마 상연을 전제로 한 희곡 지원사업의 제작비 일부도 슬그머니 없어졌다. 최소한 5년은 유지됐어야 했다. 어디에다 이 부당함을 호소해야 할지조차 막막하다. 사실 극작가를 배려하는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다. 신진 극작가들한테는 작품료가 아예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연 지원'이라는 막연한 말로 뭉개고 있다."
_ 현실적 제안이 있다면.
"이제 체념한 상태다. 한국이 언제 지긋이 (어떤 제도를) 시행한 적이 있는가. 서울연극제는 같은 극작가에게 계속 쓰게 한 폐단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30년 동안 290편을 건졌다. 그걸 보면 제도의 힘이 큰 것은 사실이다. 서울연극제는 기존 공연작이나 번역극 공연으로 문호를 개방할 필요가 있다."
_ 순수 창작 희곡은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학로의 극장이 103곳인데, 극작가 지망생들에게 그 점은 분명 희망이다. 국제 저작권법에 의하면 외국 희곡의 자의적 상연은 불가한 것으로 돼 있다. 외국 희곡 상연을 알선하는 대리 중개인이 없는 상황에서 공연은 현실적으로 창작극 위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새 번역극 공연이 낙타 바늘구멍 통과보다 어렵고, 아마 극단이 아니라면 고전작만 해야 할 판이다. 매일 100여개의 연극이 올라가는데 극단들은 작품 없다고 아우성이다. 이 판국에 창작극 빈곤 현상은 최근 더 심각해졌다. 지금 우리 연극계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나 다름 없다. 이 때, 훌륭한 극작가는 '별'이 될 것이다."
_ 공연 중인 작품으로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돼 화제를 모은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 사건'이 그 예가 될 수 있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린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다. 연극계의 문제점만 늘어놓지 말고, 극작가를 길러낼 현실적 방안을 강구할 때다. 신예 작가들로서도 그것이 소설가나 시인의 길을 뚫는 것보다 유망하다. 나는 YS정권 당시 중학교 교과서에 '들판에서'라는 것이 실렸다. 그 밖에 검인정 교과서 9개에 '파수꾼' '결혼' 등 18종이 실렸다. 이것만으로도 먹고 산다."
_ 당신은 지금 어디쯤 와 있나.
"나한테는 지금 '소멸에 대비하라'는 프로그램이 작동중이다. 육순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문제로 집약되는데, 나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대비하려 한다. 죽음을 나쁘게만 보는 것이 현대 사회다. 젊고 아름다움은 20대라는 한 시기에 국한된 것일 뿐이다. 성형수술, 다이어트 등 현대 산업문명이 제시하는 모델들을 본받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죽기 살기'를 쓴 동기이기도 하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동격인 한국어의 특성에 착안한 이번 작품은 노령사회가 된 한국에 보내는 메시지다.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여유롭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곧 삶에 대한 생각이다. 죽음을 배제하는 문화란 산업자본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 한국 연극 우울한 자화상
이강백씨는 "엄청난 충격"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립 공연시설의 장르별 특성화 방안에 의거, 대학로의 아르코대극장을 무용 중심 극장으로 만들자는 일각의 견해는 문화를 부르짖는 이 시대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했다.
그곳은 대학로의 중심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 외에도, 소극장 일색의 대학로에서 제대로 된 대극장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씨는 "극작가로서 반드시 이 문제를 기억할 것"이라며 "이런 비극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은 '국치일' 수준"이라고 말했다. 문민정부 수립 이후 사회적 죄의식이 사라지고 무대에도 웃음이 요구되면서 결국은 대학로 103개 극장의 '하향 평준화'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배우들의 발성법과 동작이 왜소화된 것도 그 결과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불균형한 한국 연극의 균형을 찾고자 하는 바람을 연극계의 이기주의로 몰아부치는 것은 불쾌한 행동이에요. 무용계를 등한시하는 게 아니죠. 연극의 상징을 빼앗으려 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니까요."
장병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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