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굽는 그릴로 유명한 프랑스의 가전업체 테팔은 지난해 하반기 국물 요리가 가능한 '한국형 그릴'을 내놓았다. 전골 요리와 불고기가 모두 가능한 구이 판이었다. 세계 각국에 각종 그릴을 수출하는 회사지만, 오로지 특정 국가 소비자를 위해 그릴을 개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프랑스 본사 임원들은 당초 "굳이 한국 소비자들을 위한 그릴을 따로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며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한국 지사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찾아가 불고기 요리를 직접 만들어 보이며 '한국인의 독특한 입맛'을 강조하자 결국 개발에 응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국형 그릴 덕분에 이 회사의 전체 그릴 판매량이 전년에 비해 두 자릿수 이상 늘었다. 한국형 그릴은 현재 독일, 포르투갈, 러시아, 동남아 등지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듯이, 현지화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진 제품들이 불황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들은 현지인의 입맛과 생활습관, 취향 등을 꼼꼼히 분석한 뒤 오랜 기간의 연구ㆍ개발(R&D)을 통해 웬만한 현지 제품보다 현지인에게 더 잘 맞는 제품으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독일의 주방용품 회사 휘슬러는 독일 공장에 한국 전용라인을 설치하고 1.8ℓ짜리 소형 압력 솥을 만들고 있다. 기존 제품은 고기 요리 등 양이 많은 음식을 만드는데 알맞은 크기였지만, 서양인에 비해 적은 양의 식사를 즐기고 끼니 때마다 갓 지은 밥을 먹고 싶어하는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작은 크기의 밥솥을 내놓은 것. 크기 뿐만 아니라 흰밥, 잡곡밥 등 화력의 차이에 따라 미묘한 맛의 차이가 나는 한국 요리의 특성에 맞춰 솥의 조절 계기도 2단계에서 3단계로 늘렸다. 이 제품은 나오자 마자 전체 솥 판매량의 10%를 넘어서는 '대박'을 터뜨렸다.
독일 명품 가전업체 밀레가 내놓은 식기세척기는 수저를 많이 쓰는 한국의 식생활을 감안, 수저를 통에 꽂아 세워서 쓰는 다른 제품과 달리 수저를 뉘어서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필립스 전자는 콩국수, 두유 등을 많이 만드는 한국 주부의 요리 습성을 감안, 다른 제품에는 없는 거름망을 단 '미니 믹서기'를 내놓아 인기를 끌고 있다.
독특한 현지화 전략으로 해외 무대를 누비는 한국 제품도 여럿 있다. 디지털 도어록을 만드는 서울통신기술은 지난달 미국 유통업체와 100만달러 어치 납품 계약을 맺으며 업계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디지털 도어록은 한국인에게 익숙하지만, 열쇠를 이용한 기계식 잠금 장치를 쓰는 미국인에겐 낯선 제품이었다. 미국은 목조주택이 많아 출입문이 보통 나무로 돼있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더욱이 전자식 잠금 장치를 쓰는 사업장은 대부분 우리와 다른 규격의 네트워크 출입통제 시스템을 갖췄다. 이런 이유 탓에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한 국내 업체들도 미국 시장 진입이 쉽지 않았다.
서울통신기술 측은 현지 품평회를 수 차례 열어 비밀번호 입력 버튼의 위치와 각도는 물론, 손잡이 굴곡까지 미국인의 습관에 맞게 고쳤다. 또 기존 기계식 잠금 장치 자리에 바로 달 수 있도록 했고, 전기충격 방지 등 최신 기술을 적용해 미국 표준규격 인증도 얻었다. 회사 관계자는 "디지털 도어록에 낯선 미국인이 열쇠로 여닫으며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열쇠 구멍을 제품 중앙에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스팀청소기로 유명한 한경희생활과학은 2003년부터 미국 시장 진출을 모색해왔다. 이를 위해 카펫 문화에 익숙한 서양인의 생활 습관을 철저히 파악, 카펫이 젖지 않고 살균까지 가능한 '살균 트레이'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살균 트레이를 부착한 스팀청소기는 지난해 미국에서 1,200만달러 매출을 올린 데 이어, 올해엔 불황에도 불구하고 5,000만달러 매출이 예상된다.
김태영 한국필립스 사장은 "인터넷의 발달로 소비자들 사이에 정보 교환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는 만큼, 소비자들의 요구 사항을 시의 적절하게 반영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면서 "본사에서도 한국 소비자들의 높은 기대수준을 감안, 현지화 전략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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