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는 전문 모델보다 가족과 친구 등 주위 사람들을 그리기 좋아한 화가였다. 그래서 르누아르의 삶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① '개와 함께 있는 르누아르 부인'(1880)
르누아르는 1880년 무렵 당시 스무살 남짓의 재봉사 알린느 샤리고(1859~1915)와 처음 만났다. 먹성 좋은 알린느를 보고 르누아르는 "연약해보이려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여자들보다 훨씬 낫다"며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알린느는 1881년 르누아르의 이탈리아 여행에 동행하면서 자주 모델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시골무도회'의 모델이 된 알린느의 화사한 미소와 충만한 행복감은 그녀에 대한 르누아르의 애정을 잘 보여준다.
알린느는 장남 피에르를 출산한 5년 후인 1890년 르누아르와 결혼, 장과 클로드까지 세 아들을 낳았다. 르누아르보다 4년 앞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남편의 곁을 지키며 작품 활동을 도왔다. 르누아르와 알린느는 알린느의 고향인 파리 동쪽 에수아에 나란히 묻혀있다.
② '장미를 든 가브리엘'(1911)
오르세미술관에 걸려있는 이 작품 속 여인은 가브리엘 르나르(1878~1959)이다. 섬세한 살결과 활짝 핀 장미가 여인의 평온한 표정과 조화를 이룬다. 관능적이고 풍만한 여인들을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았던 르누아르에게 가브리엘은 가장 중요한 뮤즈였다.
오랑주리미술관 소장품인 '누워있는 여인의 누드, 가브리엘' '알제리 여인 차림의 가브리엘' 등 이번 전시에서도 가브리엘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알린느의 친척인 가브리엘은 르누아르의 둘째아들 장이 태어날 무렵 르누아르의 집에 유모 겸 하녀로 들어왔다. 그리고 르누아르의 말년까지 그의 모델을 하다가 1914년 르누아르에게 그림을 배우러 왔던 미국 화가 콘라드 슬레이드와 만나 결혼하면서 미국으로 떠난다.
③ '장 르누아르의 초상'(1899)
이 아이는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인 장 르누아르(1894~1979)이다. 당시에는 남자아이를 치마를 입히고 머리를 기르는 등 여자아이처럼 꾸미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훗날 이 아이는 세계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거장이 된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예술적 소양을 그림이 아닌 영화적 상상력으로 발전시켜 프랑스 영화의 시적 리얼리즘 시대의 황금기를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게임의 규칙' '위대한 환상'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 르누아르'라는 책을 출간해 아버지를 기억하기도 했다.
장 르누아르는 '데데'라는 이름으로 불린 아버지의 모델이었던 앙드레 외쉴링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이번 전시작 중 '꽃장식 모자를 쓴 데데'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다. 르누아르의 그림 속 모델이었던 데데는 장 르누아르의 영화 속 히로인으로도 등장한다.
④ '폴 뒤랑 뤼엘의 초상'(1910)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굶어 죽었을 것이다." 르누아르를 비롯해 모네, 시슬레 등을 오랫동안 후원했으며, 자신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어주기도 했던 인물. 바로 화상 폴 뒤랑 뤼엘(1831~1922)이다.
그는 르누아르의 작품 1,500여점 등 인상파 작품을 무려 5,000여점이나 거래했고, 인상파 작품을 미국 등 세계로 진출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인재 발굴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뒤랑 뤼엘은 1872년 무명이던 르누아르의 그림을 처음 사들였다. 그리고 평생 그와 가까이 지내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르누아르가 말년을 보낸 카뉴쉬르메르의 집에도 그의 방이 마련돼 있었을 정도다.
이번 전시에서는 뒤랑 뤼엘의 딸과 아들 등 가족들의 초상화도 볼 수 있다. 또 '르누아르와 그의 화상들' 테마 섹션에서는 뒤랑 뤼엘을 중심으로 베르넴 전느, 볼라르 등 르누아르의 화상 3명을 조명한다.
⑤ 알베르 앙드레
전시작 중에 알베르 앙드레(1869~1954)를 그린 그림은 없다. 대신 앙드레가 그린 르누아르의 모습이 '알베르 앙드레가 본 르누아르'라는 별도의 섹션으로 마련됐다. 알베르 앙드레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르누아르에 대해 이만큼 알고 있지 못할 것이다.
르누아르의 후배 화가인 앙드레는 1894년 르누아르와 처음 만난 뒤 나이 차를 넘어 절친한 친구가 됐다. 그리고 르누아르의 큰 아들 피에르의 친구, 둘째 장의 아빠, 셋째 클로드의 대부 역할을 했다.
장 르누아르는 "알베르 앙드레의 이름만으로도 집을 밝게 비출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앙드레는 르누아르의 집에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르누아르의 일상 생활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썼다. 그는 1919년 르누아르에 대한 논문을 출판했으며,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유언집행자를 맡았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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