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장면이다. 실연을 당한 주인공 캐리가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신은 채 세 블럭이나 걷는다. 따로 흐르는 내레이션이 아니더라도 수백 달러를 호가하는 명품 구두가 망가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걷는 그 장면만으로도 그녀가 받은 실연의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구두 하나로도 인물의 내면 묘사가 가능해졌으니 이것이 바로 현대판 두두물물(頭頭物物ㆍ사물 하나하나가 전부 도이고 전부 진리이다)인 것일까.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작가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속초로 여행을 갔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이용하는 버스인 듯 좌석 등받이 시트에는 세계 유명 브랜드의 상표들이 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한 선배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프라다가 뭐야?" 주위의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선배가 무안해할까봐 나서고 말았다. "고가의 구두, 지갑 등을 팔 걸요?" 고개를 끄덕이던 선배가 다른 브랜드도 물었다. 그러다보니 등받이에 인쇄된 브랜드의 이름을 전부 입에 올리게 되었다. 고개를 깊이 끄덕이던 선배가 내 얼굴을 보았다. "어? 하성란씨 면세점에서 근무했었어?" 값이 비싸 사지는 못하지만 여자라면(요즘은 웬만한 남자들도) 브랜드 몇 개쯤은 꿰고 있다는 걸 그 선배는 몰랐던 것이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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