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98년 초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미국 GM본사와 70억~100억달러 규모의 외자유치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환란 이후 외자 유치에 힘써온 김 전 대통령에게는 엄청난 낭보였다. GM 루 휴즈 해외사업 총괄사장은 같은 해 4월 말 청와대를 예방, 김 전 대통령에게 "대우와 광범위한 합작을 추진중이다. 대우의 국내외 자동차사업에 30~50%의 지분을 투자하기위해 대우차 사업장을 실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협상은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김 전 대통령은 두 달 후 미국 순방 중 디트로이트로 날아가 잭 스미스 GM회장에게 협상을 조기에 끝내 달라고 요청했다. GM이 대우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조속히 해준다면 세일즈외교가 돋보일 수도 있었다.
GM, 시간 끌기로 헐값 인수 성공
하지만 GM은 산타클로스가 아니었다. GM은 특유의 만만디 협상으로 애간장을 태웠다. 대우차 지분 50% 이상을 사들여 경영권을 갖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폴란드 FSO, 우크라이나 오토자즈, 쌍용차 인수전에서 대우에 연거푸 쓴 잔을 마신 GM은 대우차 경영권을 장악해 동유럽과 아시아시장을 위협하는 김 전 회장의 팽창전략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김 전 회장은 제휴는 가능하지만 매각은 안 된다며 맞섰다. GM은 장기간의 실사를 통해 부채가 많은 대우차의 속살까지 들여다본 후 98년 9월 대우와 '결별'했다. 대우차는 재기 불능에 빠져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김 전 회장은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경영상태가 더욱 나빠진 대우차는 2000년 법정관리를 받게 돼 기업가치가 추락했다.
대우가 쓰러지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던 GM은 2002년 4월 주 채권은행인 산은과 협상을 마무리 짓고 대우차를 헐값에 인수했다. 협상을 맡았던 정건용 전 산은총재는 "GM이 칼자루를 쥐고, 우리는 칼날을 쥔 협상이었다"고 회고했다. 매각대금은 12억 달러지만, GM이 가져온 현금은 4억 달러에 불과했다. 초기에 최대 100억 달러까지 호가했던 매각대금은 70억→50억→40억→4억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GM의 고단수 협상기술에 채권단이 외통수로 걸렸기 때문이다.
GM이 대우차를 인수한 지 7년 만에 대우차(GM대우로 바뀜)가 본사의 파산위기로 다시 벼랑에 몰리고 있다. 지난해 8,700억원의 당기손실을 입은 데다, 선물환계약 손실도 1조원 이상 돼 자금수혈이 없으면 생존이 불투명하다. 생산물량(지난해 190만대) 대부분을 본사 해외판매망에 의존해 수출하는 GM대우로선 본사가 파산하면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GM은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구제금융(134억달러)은 해외 자회사 지원에 쓸 수 없다며 산은이 나서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원규모도 1조~2조원에 달하고 있다. 경영권을 가진 대주주(72% 보유)가 자구노력을 회피한 채 2대주주인 산은(28%)의 등을 떠밀고 있는 셈이다.
대주주 자구노력은 한국에선 사회적 합의 사항이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포기할 때 이건희 전 회장이 사재 2조8,000억원을 내놓았고, 옛 현대그룹 오너들이 옛 현대투신 정상화를 위해 개인 재산을 출연해야 했다. 상법상 주주는 유한책임을 지지만, 대주주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한국에선 대주주의 무한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대주주 자구노력은 사회적 의무
산은은 내달 초로 예정된 GM본사의 처리방향 결정과 GM대우에 대한 자구노력을 지켜본 후 나서는 게 순리다. 미리 나섰다가는 GM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 국내 기업엔 가혹한 자구노력을 강요하면서 외국기업에는 온정적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GM이 대주주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지분을 더 내놓거나 경영권을 넘겨야 한다.
GM대우가 본사 지원을 못 받고, 독자생존도 어렵다면 과거 대우차처럼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로 갈 수밖에 없다. 정부와 산은은 김우중 전 회장과는 달리 이번엔 칼자루를 쥐고 있다. 원칙을 갖고 시장논리에 따라 GM대우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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