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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8> 한국 영화. 칸에서 그 위용을 떨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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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8> 한국 영화. 칸에서 그 위용을 떨쳐라!

입력
2009.05.10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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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매년 이맘때면 영화계엔 바람이 분다. 진원지는 칸 영화제. 1996년의 일이다. 영화 <유리> 를 들고 칸으로 향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 -1984> <물레야 물레야 -1989> 가 칸 영화제 '주목할 시선' 부문에 초청 받은 이래 '비평가 주간'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의 세 번째 쾌거였다.

영화 <유리> 의 탄생과 끝은 나의 영화세계에 있어서 또 다른 도전이었다. 1995년, 한 청년이 박상륭의 소설 <유리> 를 시나리오로 만들어 사무실로 찾아왔다. 동국대 영화과 유현목 감독의 제자 '양윤호' 라는 청년이었다. 내용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사업적으로는 위험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나리오의 독특함과 그의 첫인상에 빠져 제작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양윤호 감독에게 캐스팅과 스텝, 예산에 관한 모든 결정을 할 수 있게 전권을 맡겼다. 그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동료들로 팀을 구성하였다. 감독, 촬영, 편집, 미술, 출연진 모두가 신인이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과 준비를 하였다.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어느 날, 한밤중에 파출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영화팀원 모두가 파출소에 연행되어 있었다. 영화사 지하실에서 연습하던 일행들이 한 밤중 거리로 뛰쳐나가 총연습을 감행했던 것이다.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빡빡머리 청년들이 나체로 한밤에 거리로 나와서 아수라장을 연출하니 온 동네가 놀라 자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의 톱스타 박신양, 최고의 촬영감독 정정훈(올드보이, 박쥐)이 그들이다.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했던 촬영이 끝나고 마침내 편집된 필름을 유현목 감독과 함께 보게 되었다. 그런데 유감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경만 만지다가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영화등급위원회 심의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심의통과가 어렵지 않겠느냐고 했다. 수도승이 거리에서 나체로 몸 파는 여자와 정사를 벌이고, 살생하는 장면이 영화를 압도하고 있었다.

예술을 빙자한 포르노 영화로 판정할 수도 있었다. 유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되네...." 군사정권 시절의 검열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기본적인 윤리문제를 감독은 철저히 무시하고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의 제작자였다. 포기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열심히 만든 영화가 세상에 빛도 못 보고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과격한 부분을 줄였다. 그러나 영화심의위원회는 냉엄했다. '심의보류' 판정이 내려졌다. 나는 국외 영화계 지인들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과거 <태> 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칸 영화제가 <태> 를 '주목할 시선'으로의 초청의사를 피력하자 국제 사회의 문제로 비화될 것을 염려한 검열 당국이 검열 통과를 결정했던 경험이 있었다. 나는 칸영화제로 <유리> 비디오테이프를 보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며칠 후 '비평가 주간'의 프로그래머 크리스티앙 전(현 칸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빨리 필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사태가 급전됐다. 칸영화제 초청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심의당국이 '심의통과' 판정을 내렸다. 100여개 외국영화사로부터 구매요청이 쇄도했다.

회사 자문역인 영국인 데이비드 램핑에게 세계적인 마케팅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대표단을 구성하여 칸영화제로 날아갔다. 영화제 당국은 니스공항에서부터 우리대표단을 환영해주었다. 6번의 시사회와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다. '한국영화의 비평가 주간 첫 초청작'에 대한 관심으로 시사회장은 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 지나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수도승의 살생과 노상에서의 윤간 장면이 계속되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스크린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장내가 밝아졌다. 우리 대표단과 고용한 마케팅회사 직원만이 남아 있었다. 100여개의 바이어 미팅이 모두 취소되었다. 기자회견장도 텅텅 비었다. 국력, 감독지명도, 난해함, 지나친 폭력과 섹스 등, 어느 하나도 영화의 실험성과 예술성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수많은 비용과 노력을 칸 해변에 뿌리고 빈 가방을 들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칸 영화제에서 독배를 마시자 조계종과 불교신자회, 한국불교학생회에서 '영화상영불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도승이 승복을 입고 매춘부와 놀아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국 20개 극장에 걸린 간판이 내려지고 개봉저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각목을 들고 영화사와 집으로 몰려왔다. 개봉을 강행할 경우 극장에 방화까지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영화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만일 영화 <유리> 가 예술로서의 완성도가 높았다면 나는 그들에게 승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 는 내게 예술로서의 영화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해주었고 그 해답을 칸영화제를 통해 얻게 해주었다.

<유리> 의 참담한 실패가 한국 영화의 새로운 발판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듬해부터 한국 영화는 준족의 발전을 거듭하였다. 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트로피를 거머쥐고 뤼미에르 극장으로 레드 카페트를 밟고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칸영화제에서 1명의 심사위원과 전 부문에 걸친 출품 초청을 받았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 는 당당히 '경쟁 부문'에 출사표를 내게 되었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수많은 선배들의 피와 땀과 실패와 성공이 오늘, 한국 영화의 비옥한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한국 영화는 세계 유수의 영화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영화인들이 느끼는 행복이야 당연지사다. 하지만 그 뒤에는 우리 영화를 몇 단계 높여준 관객들의 사랑이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사제복을 입은 신부가 '뱀파이어'가 되어 벌이는 살생과 정사를 문제 삼아 극장에 방화하겠다고 위협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사회는 성숙되었다. 당연히 영화인들은 이런 한국 영화에 대한 사랑을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칸영화제 장도에 오르는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감독을 비롯한 한국영화대표단에게 축하와 격려의 인사를 보낸다. "화이팅. 한국영화. 세계에 그 위용을 떨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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