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일이 끝나 저물어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지는 시,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시들이 있다. 이 시가 바로 그런 시다. 1970년대 후반에 나온 이 시를 2000년대 후반, 독일에서 읽는다.
시 안에 두 번 반복되는 '우리가 저와 같아서'를 소리내어 읽다보면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못남과 설움과 슬픔을 닮은 흐르는 물.(사족이지만 나는 독자분들에게 시를 속으로만 읽지 마시고 소리내어 읊어보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소리내어 읽을 때 활자들이 텍스트를 뛰쳐나와 가슴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경험하실 것이다)
그 강물 앞에서 하루의 노동을 마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노동기구인 삽을 씻으며 보는 떠오르는 달.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오는 한 사람은 인류가 생긴 이후로 영원히 반복되어온 사람이다. 원인류시대를 거치고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인간의 원형,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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