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머니가 서울에 오셨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자녀를 훌륭한 예술가로 키운 공로를 위로하는'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으러 몇 년 만에 서울에 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이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키우지 않겠느냐"고, "인생의 여러 길 중 아들이 예술가의 길을 간 것뿐이지, 거기에 무슨 특별한 공로가 있겠느냐"고 매우 부끄러워하셨다.
시상식장에서 코미디언 이봉원씨는 자신은 결코 훌륭한 예술가가 아니지만, 어머니는 정말 훌륭하고도 장한 어머니가 맞다고, 그건 우리나라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셨지만 나야말로 정말 어머니가 아니면 학교나 제대로 다녔을까 싶게 방황하던 청소년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때 나는 학교 다니기가 싫었다. 대관령 아랫마을에서 강릉 시내까지 매일 30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산에 올라가 아무 산소 가에나 가방을 놓고 앉아 멀리 대관령을 바라보다가 도시락을 까먹었다. 점점 대담해져서 아예 집에서부터 학교를 가지 않는 날도 있었다.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어제는 비가 와서, 오늘은 눈이 와서 하는 식으로 핑계를 댔다. 어린 아들이 그러니 어머니도 한숨이 나왔을 것이다.
그 날도 몇 번 옥신각신하다가 마지못해 옷을 입었다. 가방을 들고 나오자 어머니가 지게 작대기를 들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걸로 나를 때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낯설어 신발을 신고도 한참 멈칫거리다가 천천히 마당으로 내려섰다.
어머니는 한 손엔 내 가방을 들고, 또 한 손엔 지게 작대기를 들고 먼저 마당을 나섰다. 산길에 이르자 온통 이슬밭길이었다. 사람 하나 겨우 다닐 만큼 좁은 산길 양 옆으로 풀잎마다 이슬방울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가방을 넘겨준 다음 두 발과 지게 작대기로 이슬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몸뻬 자락이 이내 아침이슬에 흥건히 젖었다. 어머니는 발로 이슬을 털고, 지게 작대기로 이슬을 털었다.
그런다고 뒤따라가는 내 옷과 신발이 안 젖는 것도 아니었다. 신작로까지 15분이면 넘을 산길을 30분도 더 걸려 넘었다. 어머니의 옷도, 그 뒤를 따라간 내 옷과 신발도 이슬에 흠뻑 젖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땟국 물이 질컥질컥 발목으로 올라왔다.
어머니와 나는 무릎에서 발끝까지 흠뻑 적신 다음에야 산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신작로에 이르러 어머니는 품속에 넣어온 새 양말과 새 신발을 내게 갈아 신겼다.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들을 위해 일부러 준비해온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머니가 매일 이슬을 털어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날 가끔 어머니는 그렇게 학교 길의 이슬을 털어주었다. 새벽처럼 일어나 산길의 이슬을 털어놓고 올 때도 있었다. 어머니도 당신이 아무리 먼저 그 길의 이슬을 털어내도 집에서 신작로까지 산길을 가다 보면 아들의 옷과 신발이 어머니의 것처럼 젖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어머니는 아들이 다른 길로 새지 않길 기도하듯 산길의 이슬을 털어주었다.
후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이런저런 일로 방황할 때마다 마음의 이슬밭길을 털어주었다.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그랬다. 그때 어머니가 털어준 이슬이 모여 내가 걸어온 길 뒤에 맑고 푸른 강 하나가 흐르고 있다. 아니, 나뿐이 아니다. 저마다 우리가 온 길 뒤에는 어머니가 털어주신 마음의 이슬 강이 그 시절 어머니의 눈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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