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탄생한 독립국가들이다. 러시아와 함께 3대 주요 슬라브 국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두 나라에 드리운 러시아의 그늘은 생각보다 크다. 독립국 출범 18년이 지났지만 러시아 색채가 여전히 강하다. 국가 정체성도 확실히 세우지 못했다. 최근에는 금융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도움을 받았다. 수년 동안 지속된 고성장 기조도 한풀 꺾였다.
정체성과 경제문제로 고민하는 두 나라의 외부 환경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 둘러싸여 실리외교를 추구해야 하는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기술과 농업분야의 강국으로, 향후 한국과 협력할 분야도 적지 않다. 러시아권역 전문가 그룹인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의 교수진들과 함께 두 나라를 방문했다.
지난달 23일 우크라이나 최고 명문인 키예프 국립대에서 한국어과 학생들을 만났다.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에 종속된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무심코 꺼내자 금방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반러 성향의 다리나(20)도 러시아어는 유창하게 구사했다. "키예프 시민은 대부분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요."
러시아어가 사실상 공용어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도로 표지판은 우크라이나어로 돼 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러시아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식당에서도, 상가에서도, 택시에서도 러시아어가 통했다. 신문, 방송 등에서 러시아어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남부지역은 러시아 냄새가 특히 짙었다. 소비에트 시절 각종 조립공장이 집중 건설된 데다 주민의 20%가 러시아인이기 때문이다. 독립 후 치른 역대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도 압도적으로 친러 후보를 지지했다.
우크라이나 유일의 자치지역인 크림공화국은 러시아인 비율이 50% 이상이어서 러시아 영토 같은 느낌을 준다. 러시아어가 공용어이고 안내 표지도 러시아어가 대부분이다. 이 지역 소수민족협회 회장인 고려인 블라디미르 김(37)은 "러시아와 합병하자는 주민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보다 정체성 정립이 더 요원해 보인다. 15개 독립국가 중 유일하게 러시아와 국가연합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와 같은 입국신고서를 사용할 정도다. 인구의 80% 이상이 벨라루스인이지만 벨라루스어 사용인구는 10%에 불과하다. 러시아어 사용인구가 대다수라 이중언어 정책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최대 국경일도 2차 대전 당시 러시아와 함께 독일군을 몰아낸 전승 기념일이다.
국회의사당 앞의 레닌 동상이나, 모스크바의 레닌 묘를 본떠 만든 국립문화회관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이 나라의 향수가 느껴진다. 이연수 주벨라루스 대사는 "젊은이들은 서유럽에서 일하고 싶어하지만 소비에트 향수에 젖어있는 노인, 군인, 공무원, 연금 생활자 등은 지금도 러시아를 선호한다"고 전했다.
여전히 정체성 찾아가는 과정
물론 변화의 조짐도 있다. 장기집권과 언론탄압으로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최근 친러 인사를 대폭 배제했다. 도로 표지판도 벨라루스어로 교체하고 서점에서도 벨라루스어 책의 비율을 늘리고 있다.
2005년 취임한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 흔적 없애기에 더욱 열성적이다. 러시아어로 방송되는 드라마, 영화 등을 우크라이나어로 더빙해 내보내도록 했고 신문은 우크라이나어로만 발행토록 하는 정책을 검토 중이다.
지난달 24일 수도 키예프 도심에 있는 성 미하일 성당 벽에는 1932~33년 발생한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 수백만명이 사망했던 자료를 전시했다.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가 저지른 대량학살을 강조한 것이다.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산하에 있던 우크라이나 교회들은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자치교회 등으로 분화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정체성 확립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두 나라 모두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주변 강국의 끊임없는 점령 속에 제대로 된 독립국가를 건설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시절 공산당 간부 출신들의 국가 요직 독식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홍완석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장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아직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며 "그렇다 해도 의도적인 반러 정책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를 조기 정착시키는 등 제도적 정비와 의식 전환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강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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