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은 향기가 있다. 한 그루만 꽃이 펴도 삽상한 내음이 온 마당을 채운다. 모란이 향기가 없다는 속설은 <삼국유사> 에서 비롯된다. 선덕여왕이 공주 시절, 중국에서 모란 그림을 보내왔는데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이 향기가 없다는 것을 맞췄으니 공주는 영특하다는 내용이다. 식물에 무지한 일연의 시각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문화에서 과거의 왕후(王候)를 영웅시하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 삼국유사>
박지원이 당대로서는 진보적이었다지만 한자로만 글을 쓴 사람인데, 박지원의 개혁성조차 참아내지 못한 정조가 개혁 성군이고 시아버지와 권력투쟁을 하느라 나라를 말아먹은 명성황후는 구국의 여신이 된다. 그보다 더 한심한 대원군도 연속극으로 들어가면 꽤나 현명한 인물로 나온다.
천추태후나 광개토대왕이나 당대의 권력가였을 뿐 양식이라고는 21세기의 범인 축에도 못 낄 인물을 불세출의 덕성을 가진 영웅으로 불러내는 문화에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이 시대의 가치관이 들어있다.
돈 많고 권력 있어야 영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과 이혼율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으며 노동시간이 가장 많고 일에 대한 만족도는 가장 낮으면서 잠조차 가장 적게 자는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영웅이 아니다.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에는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영웅이 등장한다.
주인공 상훈은 용역깡패니 공적으로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지만, 사적으로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때문에 누이와 엄마를 잃고도 배다른 큰누이와 조카에게는 살갑다. 강한 자로부터 받은 폭력을 약한 자에게는 되물림하지 않는 영웅으로는 남편으로부터 학대 받으면서 자식은 지키던 여주인공 연희의 엄마와 상훈의 큰누이도 있다. 연희의 엄마는 폭력가정을 떠나지 못하다가 죽어서 딸에게 물려주지만 보다 젊은 상훈의 큰누이는 이혼하고 자식을 데려옴으로써 폭력의 고리를 끊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글쓰기 공부를 할 때 30대 중반의 남성이 발표를 했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형만 데리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그는 계모와 친부의 학대에 시달리다 못해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출을 했다. 공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요리솜씨는 익혔지만 조리사 시험을 볼 때마다 필기 시험에서 떨어졌다. 좌절감에 술에 빠지기도 했다. 나중에 엄마를 만나보니 형은 고등학교는 마쳤다. 배다른 동생도 고등학교는 나왔다. "공부는 내가 제일 못했지만 그래도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을 할 때 그도 입술을 깨물었고 같이 듣던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그에게 밀어닥친 불행의 주먹질을 그는 온몸으로 맞으며 그걸 남에게 풀지 않았다.
폭력 불행의 고리를 끊는 게 영웅
그러나 이 영웅들은 대접받지 못한다. 상훈은 그가 공적인 영역에서 배출하던 폭력성의 대가로 맞아 죽고, 현실의 30대는 알코올 중독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불행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져서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다. 가정이 불행하면 학교가, 사회가 잡아줘야 하는데, 학교에는 불행한 청소년을 117대나 때리는 정신 나간 교사가 있다.
폭력과 불행의 대물림은 꼭 가난한 가정의 일만은 아니다. 부모의 냉대가 가슴 아팠다며 늙고 약해진 부모를 냉대하거나 자식들에게 화풀이하는 어른들은 도처에 있다.
그러니 내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혹은 내가 겪은 교사처럼 내 자식에게 화풀이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이들은 이 폭력의 고리를 끊는 위대한 싸움을 하는 영웅들이다. 그 힘겨운 투쟁에서 져서 죽지 말라고, 당신은 위대한 싸움을 하는 중이라고 격려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돈 많이 버는 것을 성공이라고, 한 자리 차지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지 말자. 다만 제게 닥친 불행을 더 약한 이에게 대물림하려는 욕망을 끊는 이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영웅이 되기 위해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자.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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