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글이 있다. 그럴싸하게 꾸며 낸 것뿐인데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이야기.
주인공 강태국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30년째 세탁소에서 찌든 때를 빼고, 아내 장민숙은 옷 수선을 위해 오늘도 재봉틀 앞에 앉는다. 속도 모르는 딸 대영은 "남들 다 가는 어학연수도 못 보내줄 거면서 낳긴 왜 낳았냐"고 투정을 부리지만 태국은 손님들의 온갖 괄시를 견디며 옷과 더불어 타락한 사람의 마음까지 빤다. 이 착한 연극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의 내용은 분명 극작가 김정숙(49)씨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서울 대학로에서 2005년부터 장기 공연되며 지난 4월 기준으로 17만명의 관객을 동원, '100석 소극장의 기적'으로 불려온 연극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이 최근 또 한 번의 경사를 맞았다. 이 작품의 희곡을 수록한 금성출판사의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2009학년도 교과서 검정 심사를 통과한 것.
현재 공연 중인 연극의 희곡을 청소년들이 수업시간에 배우게 된 특별한 사건이지만 김씨의 기쁨은 정작 작가로서 자신의 영광에 있지 않았다. "미래의 관객인 청소년이 볼 만한 연극이 드문 현실에서 희곡이라도 읽고 문화의 꿈을 꿀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죠. 출판사와 평가원의 용기있는 결정에 놀랐을 뿐이에요."
"문화활동은 자기를 희생해 타인의 행복을 늘리는 이타 행위"라고 말한 그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집필 동기를 회상했다. "미래를 이어갈 청소년들이 사회에 나와서야 문화를 체험하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는 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극단 에저또의 제작 스태프로 시작해 연극계에 몸 담은 지 벌써 28년째. '착한 사마리아인은 먼 데 있지 않다'는 희망을 담은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은 그의 전작들과 차별화되는 작품이다.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블루사이공' 등 역사성 짙은 작품을 주로 썼던 그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
"한때 유방암을 앓으면서 죽음의 공포가 현실화된 적이 있었어요. 한 번만 더 대학로에 돌아가게 해 준다면 지금과 다르게 연극을 해보겠다고 통곡했었죠. 그런데 정말 허무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그간 내 욕심으로 연극을 했구나. 잘난 척 하려고 희곡을 썼구나' 싶었거든요."
그는 고교 시절 국립극장에서 난생 처음 연극을 본 뒤 '연극을 하고 싶다'도 아닌, '저 배우들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그 꿈을 이룬 지금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갇혀 있기보다 연극을 통해 인생을 희망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어린이 극작교실'을 여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극을 써 보게 하면서 연극을 만들 듯 인생도 스스로 원하는 대로 꾸려갈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대표이기도 한 그가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 아동극을 극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갖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씨는 서울시뮤지컬단이 9월에 선보일 한일합작 뮤지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 남자를 사랑한 일본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침묵의 소리'에 한국측 작가로 참여한다. 한일 양국 간 보이지 않는 상처가 치유되는 작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 중이라고 한다.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이 오랜 기간 사랑을 받으며 교과서에 실리는 영광까지 누리게 된 비결은 아마도 희망 때문일 거예요. 사회의 슬픔과 억압을 다루는 것만 연극의 사회성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끌어내 관객이 스폰서가 되는 연극을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사회참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네요." 공연 문의 (02)3673-0888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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