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에 불려가는 전직 대통령의 천리 길은 길고 고단했다. 지난해 퇴임과 함께 봉하마을로 내려올 당시 위풍당당하던 '노짱'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돼 상경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끝내 떨리는 목소리로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30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은 새벽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날 밤부터 배치된 경찰 2개 중대(220여명)가 삼엄한 경비태세에 들어갔고, 오전 5시부터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 회원 100여명이 노란 목도리를 두른 채 속속 모여들었다.
노 전 대통령이 사저 현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전 7시57분. 쥐색 정장에 회색 넥타이를 맨 채 평온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부쩍 늘어난 흰머리에는 오랜 '칩거 생활'로 인한 심적 고통이 그대로 묻어났다.
계단 양 옆으로 늘어선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하진 전 여성부 장관 등 참여정부 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당으로 내려선 노 전 대통령은 승합차에 올랐다. 승합차가 50여m를 이동해 대검 청사로 향할 버스 앞에 도착하자, 노 전 대통령은 승합차에서 내려 취재진의 포토라인 앞에 섰다.
노사모 회원들이 '노무현'을 연호하는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은 두 손을 모은 채 잠시 먼 산을 응시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짓던 노 전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입을 뗐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다시 얼굴을 든 뒤에는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가서 잘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지지자들을 향해 허리를 깊게 굽혔다.
10여m를 걸어 버스 앞에 도착한 노 전 대통령은 다시 환한 표정으로 지지자들에게 오른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버스에 오를 때는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과 전해철 전 민정수석, 김경수 비서관과 경호팀 관계자들까지 태운 버스는 경호차량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8시2분 출발했다. 경호차량과 언론사 취재차량 등 10여대도 뒤를 따랐다. 노란 풍선을 들고 연도에 늘어선 지지자들은 천천히 움직이는 버스 앞으로 노란 장미꽃을 뿌리며 노 전 대통령을 배웅했다.
복잡한 상경길
청와대 경호처가 주관한 김해에서 서울까지 400㎞ 이동은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이날 출발 직전까지 이동 관련 제반 사항은 안전을 고려해 극비에 부쳐졌다. 특히 구체적 경로는 출발 20여분 전에야 경남경찰청에 통보됐고, 이 역시 이동 중에 바뀌었다.
당초 경찰이 경호처로부터 통보받은 계획은 대전-통영 고속도로와 당진-포항 고속도로, 논산-천안 고속도로 등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다소 돌더라도 통행량이 적은 구간을 이용하겠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출발 이후 중부고속도로로 갑자기 방침이 변경됐다. 시간 단축을 위해 최단 경로를 택한 것이다.
오전 8시17분 진례ㆍ진영 나들목(IC)을 통해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한 버스는 8시34분 칠원분기점(JC)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 탔고, 10시24분 낙동JC에서 다시 청원-상주 고속도로로 길을 바꿨다.
한 시간 뒤 버스는 청원JC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올라 낮 12시20분쯤 입장휴게소에 도착했다. 당초에는 수행원의 생리 현상과 운전사의 피로 등을 감안해 속리산휴게소에서 쉴 계획이었지만 경호보안 등의 이유로 휴게소도 변경한 것이다.
취재차량은 버스가 봉하마을을 출발한 뒤부터 줄곧 따라 붙었지만 버스 유리창이 검은색으로 짙게 칠해져 있어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데는 실패했다.
입 닫은 노 전 대통령
오후 1시10분께 양재IC를 빠져나온 버스가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20분. 당초 검찰과 약속한 시간보다 10분 이른 시간이었다.
피의자가 된 전직 대통령을 맞는 검찰 직원들과 취재진은 숨을 죽이며 노 전 대통령이 버스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버스 문은 이내 열리지 않았고, 청사 앞엔 적막이 흘렀다. 정확히 2분 뒤 문이 열리고 문 전 실장 등 변호인과 수행원들이 먼저 내린 뒤 노 전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하차했다.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포토라인 앞에 서서 굳은 표정으로 취재진을 둘러보던 노 전 대통령은 가급적 말을 아끼려 했다. "오늘 아침 '면목없다'는 심경을 밝힌 이유가 무엇인가"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면목 없는 일이죠"라고 작게 말했다.
"현재 심경은", "100만달러 사용처를 밝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노 전 대통령은 "다음에 하시죠"라고 말한 뒤 곧바로 대검 사무국장의 안내에 따라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5시간17분이나 걸린 374㎞의 긴 여정도 착잡한 심경만큼이나 그를 괴롭힌 듯했다.
김정우 기자
김해=권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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