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기침체를 맞아 글로벌 선진기업들의 연구개발(R&D) 전략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자동차, 생활, 제약 등 일부 업종의 경우 생존을 위해 R&D 투자를 줄이는 기업들이 나오는 반면, 오히려 이익이 줄어도 R&D 투자규모를 늘리는 기업도 있다.
세계적인 생활용품 업체 유니레버는 최근 연구소를 통합하며 연구인력을 250명 감축했으며, 미국 최대 제약사인 화이자는 과학자 800명을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MS)는 전체 인력의 5%인 5,000명을 감원하면서도 R&D 인력은 오히려 3,000명을 더 확충하고, R&D투자금액도 작년 대비 10억 달러 증가한 90억 달러(올해 예상매출의 15%)를 쏟아 부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과연 불황이 끝난 후 승리의 여신은 어느 편을 향해 미소를 지을까. 물론 불황에도 R&D 투자를 아끼지 않은 기업이 성공하는 것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호ㆍ불황에 관계없이 지속적인 R&D 투자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전략은 달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성민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불황기 R&D는 ▦효율성 극대화 ▦고객의 핵심가치 최우선 ▦미래 성장동력 준비 등 크게 3가지 전략을 염두에 두고 추진해야 실패를 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열린 R&D로 효율성 극대화
비즈니스 전략이론의 대가 로버트 버겔만(Robert Burgelman)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는 "한국의 대기업들은 엄청난 돈을 R&D에 투자하지만, 새로운 비즈니스를 발견하는 전략적 연계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R&D 투자의 '크기'가 아니라, R&D가 기업이익으로 연결되는 '효율성'이 중요하다는 얘기.
R&D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 '열린 R&D'다. 이는 기업 외부에서 개발된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활용하거나 내부 기술자원을 전략적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이는 비용절감 효과와 더불어 제품개발의 신속성과 혁신성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대표적으로 P&G는 '외부의 기술을 자사의 R&D 역량과 결합시킨다'는 의미의 C&D(Connect & Develop)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스핀팝(회전 막대사탕)이라는 장난감 기술을 활용해 기존의 10분의 1 수준의 값싼 전동칫솔을 개발한 것이 대표적 성과다. 이 회사는 지금 미국의 핵무기를 개발한 병기 연구소인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샌디아 국립연구소 등과 손잡고 그들의 슈퍼컴퓨터와 두뇌집단을 활용, 소비제품에 쓰일 친환경 신소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고객 요구 위주의 R&D
또한 제품에 모든 기능을 담으려 하기보다는 고객이 필요한 핵심가치에 집중하는 R&D 전략이 필요하다.
인텔은 무선인터넷을 즐기는 생활양식 변화에 발맞춰 인터넷 기능에 특화된 저가의 Atom 중앙처리장치(CPU)를 개발함으로써, 작고 가벼운 '넷북'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업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인텔이 이처럼 소비자 트렌드에 한발 앞서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본사에 있는 '인간행동연구소'(People and Practice Research)의 연구 덕분이다.
이 연구소에서는 디지털 세상에서 미래의 디지털기기를 예측하기 위해 다수의 인류학, 심리학 박사들이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분석한다. 예를 들면 "말레이시아 국민은 하루에도 수차례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따라서 이 지역 휴대폰에 들어가는 칩에는 낯선 곳에서도 메카의 방향을 잘 찾아주는 기능이 추가돼야 한다"(최근 인간행동연구소 보고서 중)는 식의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를 위한 R&D
마지막으로 시장의 메가트렌드를 읽고 불황 이후 시장을 주도할 핵심 기술력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 일례로 코닝은 2001년 정보기술(IT) 붕괴로 100억 달러를 투입했던 광섬유사업이 55억 달러 적자를 초래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이 회사는 여전히 매출액의 10%를 R&D에 투자하고, 특히 그 중 3분의 1을 중장기 연구에 투입, 불황 이후 액정TV용 유리기판 시장점유율 50% 돌파라는 쾌거를 이뤘다.
생존 자체가 불투명한 불황기에 R&D에 지속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CEO의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범일 삼성연 연구위원은 "닌텐도 CEO 이와타 사토루는 과거 개발 실패로 비난 받던 개발자들을 오히려 사장 직속 프로젝트팀으로 결집,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며 "R&D가 회사를 살린다는 CEO의 신념만이 기업의 내일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불황기 한국인 소비성향 3S · 불황기 마케팅 전략 IDEA
불황기에는 고객의 성향도 달라진다. 따라서 기업들이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달라진 고객을 잘 이해하고 맞춤형 마케팅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8년부터 매년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설문조사를 실시해온 제일기획은 최근 설문결과를 바탕으로 불황기 한국인 소비성향을 분석했다. 분석결과에 따르면 불황기 한국인의 소비성향은 '3S'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첫째는 자극적 미니스커트나 강렬한 색상의 색조 화장품, 매운맛 음식 등을 통해 소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싶어하는 욕구(Sensualㆍ육감)다. 둘째는 돈에 대한 부담감이 늘어나 상품의 물리적 가치와 함께 감성적 혜택까지 민감하게 고려하는 성향(Sensitiveㆍ민감)이다. 마지막은 'Sensible'(교감)로, 불황시에는 소비자들이 정보에 더 목말라 한다는 얘기다.
IDEA
이에 따라 제일기획은 불황시 고객 마케팅 전략을 나타내주는 키워드로 'IDEA'를 제시했다.
Integrate(가치를 합쳐라)- 불황기 소비자들은 비용에 대한 부담이 커져 예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기대한다. 최근 엔씨소프트와 동서식품은 제휴를 통해 동서식품의 맥스웰하우스를 구매한 고객에게 리니지2의 게임 아이템을 제공했다. 게이머가 보통 밤 늦게까지 게임에 몰두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 그 결과 동서식품은 작년 12월 서비스 시작 이후 한 달도 안돼 1,000만캔의 판매고를 올렸다.
Divide(시장을 나눠라)- 불황기라 해도 시장을 잘게 쪼개 보면 소비자들이 쓸만한 곳에는 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여년 전 외환위기 당시 남양유업은 오히려 예전보다 1.5배 비싼 분유 '임페리얼드림'을 내놨다. 아이에게만큼은 고품질 분유를 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을 읽은 것. 그 결과 99년 임페리얼드림은 전년대비 40%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Explode(개념을 부숴라)- 제품의 개념을 파괴하면 새로운 씀씀이를 창조할 수 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초콜릿 소비는 꾸준히 줄어들다가 2006년 갑자기 큰 폭으로 성장한다. 이는 2006년 카카오 초콜릿이 나오면서 초콜릿에 대한 개념을 '살찌고 몸에 해로운 음식'에서 '피부노화를 막고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웰빙음식'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Announce(알려라)- 올해 대부분의 자동차업체가 광고를 줄이는 상황에서 현대자동차는 미국시장 광고를 크게 확대했다. 작년에는 총 2편의 광고를 실시했으나, 올해엔 가장 비싼 슈퍼볼 광고를 포함해 총 5편의 광고를 집행한 것. 그 내용은 구매자가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겠다는 보증 프로그램으로, 실직 공포에 떨고 있는 미국 소비자를 정면으로 공략했다. 그 결과 2009년 현대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대비 14% 증가했다.
문준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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