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발소를 갔다 오면 시골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의 이번 달 이발날짜를 미리 잡기위해서지요.
손재주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제 어릴 적 한 달에 한번은 사랑방 부뚜막 옆에서 제 목을 보자기로 대충 감싼 다음 등잔불 심지로 석유 한 방울 찍어 이발기계(바리캉)에 바르시고는 제 뒤통수쪽 머리부터 빡빡 밀어대셨습니다. 오래 사용한 바리캉은 녹슬고 날이 무뎌져서 툭하면 제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면 아버지께서는 바리캉 나사를 풀어 톱니두개를 분리한 뒤 구둣솔로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석유를 쳐서 조립 후 다시 깎아 주셨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이발소에 안 데려가주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지요. 예쁜 상고머리로 깎아 주시길 바랬지만 아버지께서는 항상 빡빡 깎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제 입은 퉁퉁 부어 올랐죠. '내일 어떻게 학교 가나? 다른 애들은 이발소에서 예쁘게 깎고 올 텐데…. 놀리지는 않을까?' 차라리 이발기계를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어느덧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버지께서 그랬듯 저도 아들이 유치원 때부터 초등 4학년까지 족히 6년 정도 직접 머리를 깎아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녀석의 거부로 저는 더 이상 아들의 이발사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아버지께서 추수를 하시다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 이발소를 갈 수도, 그렇다고 이발사에 모셔올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베란다 창고에 넣어두었던 이발도구를 꺼내 들고 시골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버지 왼쪽 귀 옆에 깊게 패인 수술자리가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했습니다. 그걸 보며 슬픔과 후회가 치솟았습니다. 진작에 아버지 건강을 챙겨드리지 못한 자책감…. 서산서부터 앰뷸런스가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병원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죄송스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아버지 머리에 떨어졌습니다.
이발을 해드리면서 하느님께 빌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사랑을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돌려드리겠습니다. 오래오래 이발해드릴 수 있게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도록 해주세요.' 다행히 아버지는 벌써 6년 넘도록 제 이발서비스를 받고 계십니다.
이 세상 최고로 존경하는 아버지, 자식 낳아 기르면서 아버지께서 제 머리를 직접 깎아주신 그 모두가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영원한 개인전용 이발사이니까 필요하실 때 언제라도 불러주세요. 아주 오래도록, 한 30년 더 아버지의 전용이발사로 일하고 싶은 막내아들입니다.
경북 안동시 용상동 - 유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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