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특히 우리 욕을 나보다도 잘 하는 미국인 친구와 커피를 마실 때였다. 그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한국 좁긴 좁아요. 유명한 사람들 정말 자주 만나요." 자신이 글을 번역한 소설가들을 신문에서 보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유학 와 잠깐 연애했던 여자친구가 아나운서가 되어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면 평생 그럴 일이 없다고 했다. 세계지리부도를 처음 받던 날 기억이 새롭다.
하도 미국, 미국 해서 우리나라 땅을 컴퍼스로 재 미국 땅을 분할해보았다. 아, 크긴 컸다. 그래도 땅이 좁아 좋을 때도 있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다. 매번 가장 꾸미지 않아 미워보일 때란 게 문제이지만. 얼마 전 소설가 이명랑이 물었다. 소설을 쓴다니까 아이의 친구 엄마가 혹시 이 사람 아냐고 물어보았단다. 세상에, 20년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전화 속 목소리는 그때와 똑같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그애를 처음 만난 건 단과학원이었다. 수많이 아이들이 와글대던 강의실, 별안간 입고 있던 치마의 줄줄이 단추들이 와르르 풀어졌다. 놀란 남학생은 황급히 얼굴을 돌렸고 나는 입만 벌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 옆의 누군가 재빨리 점퍼를 벗어 내 치마를 덮었다. 그애가 바로 유희정이었다. 언니 나 살 많이 쪘어요. 그애가 20년 전 그때처럼 수줍게 웃었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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