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시 다도면, 덕룡산 줄기인 국사봉 아래 옹기종기 자리잡은 덕림마을. 마을 앞으로 국사봉에서 나주호로 이어지는 덕림천이 흐르고 100년은 족히 넘었을 느티나무 네 그루가 마을 수호신처럼 서 있는,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은' 동네다.
1일 오전 11시30분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보리밭에서 풍겨오는 짙은 봄 향기와 함께 생선 굽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국사봉 줄기를 따라 드넓게 펼쳐진 밭에선 주민들이 고추 모종을 옮기기 위해 둑을 만들고 그 위에 비닐을 까는 작업이 한창이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주민들이 일손을 멈추고 삼삼오오 마을회관으로 모여들었다. 마을회관 옆 수로에서 흙 묻는 장화를 씻던 한 아주머니가 인근 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얼릉 (일) 끝내고 오랑께~. 밥 다 식겄구만~."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 5개가 놓여있다. 이날 메뉴는 붕어찜과 정어리구이, 상추겉절이, 묵은지, 무말랭이무침 등 10여가지나 됐다.
10평 남짓한 마을회관은 어느새 장터 주막처럼 왁자해졌다. "아따 오늘 뭔 상이 이렇게 걸다냐." "아짐 밥 좀 더 주쇼." "아제 술 한 잔 하쇼." "간동댁 하고 한정양반이 안 보이네." 50대부터 90대까지 한 마을 주민 40여명이 한 곳에 모여 점심을 먹는 풍경은 동네잔치를 연상케 했다.
남자 어르신들은 새벽부터 고된 일을 하고 온 터라 술 한 잔으로 땀을 식힌 뒤 밥 한 그릇을 가볍게 비웠다. 다들 무에 그리 바쁜지 숟가락 내려놓기가 무섭게 들로 가는가 하면, 부녀회원이 권하는 커피 잔을 든 채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금방 밥 묵었은께 좀 쉬었다 가랑께." 이장님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남자들은 순식간에 마을회관을 빠져 나갔다.
이제 밥상은 할머니들과 부엌 심부름 하느라 분주하던 부녀회원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농사걱정에 동네자랑, 자식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부녀회원 이송자(61)씨는 "우리 마을 친환경 고추와 깨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품"이라며 "고추 모종 옮길 때는 밥 할 시간도 없이 바쁜데 마을에서 공동급식을 하니 밥맛도 나고 일도 많이 할 수 있어 좋다"고 자랑했다.
이길용(69)씨는 "10년 전 필리핀서 시집 온 며느리가 손주를 세 명이나 낳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며 "마음씨 곱고 키도 커서 우리 며느리가 질로(제일) 이쁘다"고 활짝 웃었다. 아낙네들의 자랑잔치는 밥상을 물리고 후식으로 커피와 사탕을 내올 때까지 이어졌다.
25가구 50여명의 덕림마을 주민들은 봄과 가을 농번기에 50여일을 이날처럼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태 전 가을부터 나주시의 '마을공동급식' 지원을 받으면서 생긴 새로운 풍속도다.
마을공동급식은 새벽부터 논밭에서 고된 일을 한 여성농업인들이 점심 때가 되면 집에 돌아가 음식을 장만해 내가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식사 인원이 20명 이상일 경우 같은 마을에서 음식솜씨 좋은 여성을 '급식 도우미'로 지정, 하루 3만5,000원을 지급하고 식사준비를 맡긴다. 급식 도우미는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가져온 쌀과 채소, 생선 등 찬거리들로 점심을 차리는 역할을 한다.
덕림마을 급식 도우미이자 부녀회장인 한미자(50)씨는 "온 동네 사람들의 점심을 준비해야 하니 부담도 되지만 부녀회원들이 많이 도와줘 즐겁게 하고 있다"며 "일감이 많은 봄에 급식하는 기간이 너무 짧아 아쉽다"고 말했다.
공동급식은 여성농업인들의 일손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마을 주민들간 공동체 의식을 돈독히 하는데도 한 몫 한다. 한데 모여 점심을 먹다 보면 옆집 뒷집 대소사를 자연스레 알게 되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니 절로 정이 쌓인다.
이 마을 차종수(58) 이장은 "주민들끼리 단합도 잘 되고 이웃간 인심도 좋아져 마을 전체가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나 홀로 노인'이 많은 농촌 특성상 끼니를 소홀히 하는 노인이 적지 않는데, 공동급식으로 이런 문제도 해결됐다.
나주시가 2007년 9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15개 마을에서 시작한 마을공동급식은 2008년 봄, 가을 합쳐 62개 마을로 늘었다. 올해은 봄에만 48개 마을에서 1,400여명의 주민들이 공동급식 혜택을 받고 있다.
김태구(56) 나주시 자치농정과장은 "공동급식으로 부녀자들 걱정 덜고 일의 능률과 함께 공동체의식도 높이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면서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 공동급식을 배우기 위해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나주=김종구 기자 so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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