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주변 인도는 지지자들과 반대자들로 메워졌다. 보수단체 회원 400여 명은 '노무현 구속'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부정부패 척결" 등을 외쳤다. 노사모 회원 등 500여 명도 노란 풍선을 들고 줄 지었고, '당신이 있을 때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플래카드도 걸었다.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한 경찰이 1,000명은 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조된 양측의 열기를 덮지는 못했다. 양측은 여러 차례 몸싸움을 벌이며 고함과 주먹질을 주고 받았다. 오후 1시19분께 버스가 대검 정문에 들어설 무렵 양측의 지지ㆍ반대 구호는 절정에 달해 "사랑합니다" "구속하라"는 구호가 엇갈렸다. 버스에 신발과 달걀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대검 청사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양측의 지지ㆍ반대 시위는 계속됐다.
친노ㆍ반노 시위대의 집착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하는 역사적 사건에 무관심할 사람은 드물다. 마찬가지로 할 일이 태산 같은 평일 대낮에 자신의 정치ㆍ사회적 의사를 표출하려고 모여들 사람 또한 드물게 마련이다. 일단 모인 뒤라면, 현장 특유의 분위기에 몸을 실어 구호를 외치고, 박수를 치고, 용감하게 '적'에게 돌진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지간한 정성 없이는 피켓과 풍선, 현수막 등을 미리 준비하고, 아침 밥 먹고 길을 나서서, 몇 시간이나 '때'를 기다리긴 어렵다.
과거 전국 방방곡곡의 지지자들이 여의도나 해운대에 모여 '100만' 세를 과시하던 때처럼 조직적 동원이 이뤄진 흔적도 없다. 그런 점에서 대검 청사 앞의 친노ㆍ반노 시위대는 경이로웠다. 특정인에 대한 지지와 비난의 심정을 그토록 철저하게 드러내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 열정과 집착이 부럽고도 두렵다.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다. 추운 날씨에 발발 떨며 방송사 앞에서 기다리다가 녹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인기 연예인의 컴컴한 차량에 대고 목이 터지게 "오빠! 오빠!"를 외치는 10대 소녀들.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찬바람 부는 청계광장에서 "미친 소는 너나 먹어라"고 외치던 아줌마. 모두 축제나 종교의례의 집단적 환상이 빚어내는 듯한 열정의 모습이다.
4ㆍ29 재ㆍ보선에서도 비슷한 걸 보았다. 경북 경주의 국회의원 재선거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영남권의 정치 맹주 이상임을 확인시켰다. 선문답 같은 그의 언행에서 유권자들이 속뜻을 읽어낸 것은 종교적 추종에 가까운 열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제1야당인 민주당의 집요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득표를 기록하고, 신건 전 국정원장을 당선시켜 '전북 맹주'를 예약한 것도 지역 유권자들의 무조건적 열정 때문이다.
경주와 전주 유권자들이 보여준 열정은 정치제도화의 근간이자 의사표출의 핵심 매개체인 정당을 제치고 직접 '맹주'와 소통하려는 욕구다. 이런 직접 소통 욕구가 이른바 '대안 매체'가 발달할수록 커지는 현실은 소통이나 정보 전달 부족이 요인이 아님을 일깨운다.
다양한 형식의 영상매체 발달로 굳이 현장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스타와의 '가상 접촉'이 가능하지만, '오빠 부대'가 계속 늘어나는 것과 닮았다. 욕구 충족의 경험이 더욱 강한 자극을 요구하는 '한계효용 체감'이 만연하고, 이미 정치도 그 바퀴에 휘말렸다.
'개인'자각 없이는 위험
이런 흐름은 언뜻 '집단'에서 벗어난 자각한 '개인'의 개성 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장성과 즉흥성을 향한 욕망은 오히려 몰개성과 집단환상으로 달린다. 예술이나 종교와 달리 정치ㆍ사회 영역에서는 냉담보다도 해롭다.
우리는 구미 선진국과 달리 '개인'의 숙성을 거치지 못한 채 곧바로 국가와 민족, 사회로 달려왔다. 흔히 공적 영역에 대한 무관심을 우려하지만, 근거 없는 집단적 열정이 더 걱정되는 이유다. 차분하게 개인의 이해와 개성을 되돌아 보고 다시 모여 손잡아도 늦지 않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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